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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공의 경계(2007) - 분위기와 캐릭터로 즐기는 애니메이션

 

1.

제가 전부터 이쪽 분야 친구들에게 자주하는 말이 '나스는 서사에 재능이 없다.'입니다.

그 사람 글을 읽고 나면 항상 드는 생각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내용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글을 정말 이해하기 힘들게 쓴다.'입니다.

쓸데없이 문장을 길게 늘리는데다가 자신만의 용어도 많고 그렇다고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방대한 양의 설정을 따로 공들여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야기꾼으로서는 큰 단점입니다.

 

반대로 나스의 장점을 꼽으라면 강렬한 씬과 캐릭터의 창조를 듭니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는 잊어버릴지언정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씬은 타입문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즉, 이 분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길 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얼마나 재현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ufortable과 타입문 작품과의 조합은 기본적으로 실패하기 힘든 조합입니다.

관객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작화로 압도하면 강렬한 시각적 심상을 제공하는 원작의 매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으니까요.

 

2.

전체적인 줄거리는 가문이 긴 세월 동안 계속되어 온 연구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근원에 이어진 육체를 가진 료우기 시키와

인류에게 실망하여 그 몸을 이용해 근원에 도달하는 것으로 멸망을 추구하는 아라야 소렌의 싸움입니다.

 

시키가 의식을 잃게 된 계기부터 마지막 리오의 범행까지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아라야 소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후조 키리에, 아사가미 후지노, 시라즈미 리오가 전부 아라야 소렌의 배치한 말이었고

쿠로기리 사츠키와 코르넬리우스 아르바도 소렌이 불렀다는걸 생각하면 예외가 정말로 모든 일의 흑막입니다.

 

3.

이 작품을 보면서 든 감상은 철저하게 원작을 본 사람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는 연출도 연출이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의 이해보다는 원작 재현을 중시한 시리즈 구성을 보면 그 점이 훨씬 명확해지죠.

 

시작이 '부감풍경'인데 신규 관객을 배려한다면 '가람의 동'부터 시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감풍경'은 처음 도입부와 사건을 보면서 미스테리같은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판타지로 장르를 틀어버리는 작품이라서 저도 처음 읽을 때 상당히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살인고찰도 전편과 후편이 상당히 떨어져있는데 소설과 달리 2년이나 텀이 생기는 극장판이라면 이러한 구성은 불친절하죠. 

 

하지만 반대로 원작을 읽고, 공의 경계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즐거운 작품입니다.

이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원작 팬들이 왜 이 작품을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 자체가 이야기의 짜임새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작품이 아닙니다.

괜히 구질구질하게 설명을 덧붙이느라 템포를 늘어지게 만드는 것보다 

평범한 일상의 뒤에 신비가 넘치는 타입문의 세계를 스크린에 옮기는 것에 집중하였고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 설정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보다

매력적인 시키의 모습과 그녀가 펼치는 고양이과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액션을 한 번이라도 더 보여주었습니다.

 

저번에 원더키디 리뷰를 할 때도 언급하였지만 저는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목적성이 얼마나 명확한지를 중요시합니다.

그 면에 있어서 이 작품의 제작진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4.

재미있게 보았던 편은 통각잔류와 모순나선, 그리고 공의 경계였습니다.

 

통각잔류는 예의바른 요조숙녀인 겉모습과 달리 단단히 망가져있는 아사가미 후지노를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표현하였더군요.

미스테리적 요소를 적절하게 섞은 판타지라서 가장 공의 경계의 정체성에 걸맞은 에피소드라서 원작부터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후반부 브로드 브릿지를 통채로 뒤틀어 버리는 장면도 상당히 박력있게 연출되어 있었습니다.

사건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가 후지노를 받아들인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후지노가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봐야하지 않나요?

저 능력과 천리안이 합쳐지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전혀 저항할 방법이 없을텐데요.

 

모순나선은 불친절의 극치를 달린 작품입니다. 

아무리 타입 문의 팬덤이 크다고 하여도 저런 작품을 극장에 걸 생각을 했다는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공의 경계를 처음 접하는 후배에게 물어보니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신기한건 그럼에도 재미있게 봤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확실히 액션과 비주얼만 감상해도 2시간은 금방 지나가지요.

원작을 본 입장해서는 기괴하게 배치된 조각들이 이어지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저 고쿠도가 돌아와서 남자와 동거하는 시키를 봤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공의 경계는 정말로 별거 없는 이유입니다.

경계 시키가 정말로 예쁘게 나왔던군요. 말 그대로 눈 오는 날 마주하게 된 귀인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자태였습니다.

그 존재를 느낀 고쿠도가 한 번에 반한게 이해가 가네요. 물론 그걸 시키에게 솔직히 말하면 그야말로 칼부림이 나겠죠.

이야기 자체는 마지막까지 따라와 준 팬들에게 공의 경계란 이야기의 정체를 20분에 걸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반대로 별로 재미가 없었던 편이 망각녹음과 살인고찰(후)입니다.

 

망각녹음은 이야기의 개연성이 너무 약해서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지 못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요정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아자카가 후반부에는 어떻게 현란한 동작으로 요정을 피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마지막에 방 하나에 왜 여학생들이 다 몰려있는 이유도 설명도 해주지 않았죠. 너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작품입니다..

 

반대로 살인고찰(후)은 그냥 지겨웠습니다.

내용은 원래도 알고 있고, 몰랐더라도 저런 식의 연출에서 예상 못하는게 이상한 뻔한 방식이었는데

처음 30분 정도까지는 비쥬얼적인 면을 즐기며 볼 수 있어도 비슷한 색감, 비슷한 느낌의 풍경이 계속되는 상황이 나중에는 지루하였습니다.

연출에 공을 들은 느낌은 나는데 그래도 러닝타임 2시간은 좀 무리수가 아니였나 싶습니다. 30분 정도 줄였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5.

혹시나 하고 Yes24에 검색해보았는데 역시나 BD 국내 정발은 안 되어 있더군요.

전편 수집까지는 아니어도 한 두 편 정도는 살 생각도 있었는데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