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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천체전사 선레드(1기: 2008, 2기: 2009)

 애니메이션 동아리뿐 아니라 제가 소속된 전산 동아리 KaLi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곤 하였습니다. 주로 음식을 배달시켜서 함께 식사할 때, 동아리 대형 TV에 컴퓨터를 연결해서 애니메이션을 틀곤 하였죠. 처음에는 사우스 파크를 트는 일이 많았는데 제가 강하게 거부하여서 다른 작품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사우스 파크에 대해서 역겹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가끔 사람 중에서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데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저런 작품이 나오겠지 싶은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틀던 작품이 미국 드라마인 빅뱅 이론이나 이 작품인 천체전사 선레드였습니다. 이 작품도 사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실소가 나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 먹고서 어린 시절 보았던 후레시맨이나 바이오맨 같은 특수 촬영을 다시 볼 생각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제 예상과 다른 작품이었고 제가 KAIST에서 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일본 카나가와현 카와사키시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나라식으로 비유하면 저기 경기도 부천시를 배경으로 하는 정의의 용사 선레드와 악의 조직 프로샤임의 대립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국가의 위기도 세계 평화도 아닌 도시 하나 규모의 참으로 아담한 둘의 대립이지만 그마저도 작품 시작도 전에 이미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왜냐면 누구도 선레드의 자비 없는 돌주먹을 배겨낼 수 없다는 것은 선레드도 프로샤임의 괴인들도 알고 있거든요. 심지어 선레드의 여자 친구인 카요코는 선레드가 다칠까 걱정하기는커녕 선레드에게 맞고 다니는 괴인들을 동정하고 편들어 줄 정도니까요. 이 작품은 그렇게 지켜지고 있는 마을의 평화 한 꺼풀 뒤에 있는 히어로와 괴인들의 조금은 씁쓸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프로샤임의 괴인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재능과 능력을 갖추고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가지고 모인 자들입니다. 개중에는 자신을 믿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 장밋빛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정든 고향을 등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을 가로막는 선레드라는 벽은 가혹하기만 합니다. 허름한 단칸방에서 월세 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생활과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는 히어로 선레드,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삶에 수많은 괴인의 마음이 꺾여나갑니다. 이러한 현실에 나가떨어져 젊은 시절 꿈을 접고, 다른 길을 찾아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괴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라면집을 차리거나, 딸기 농장에 취직하여 주인의 딸과 미래를 기약한다던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이 사회의 공헌하는 시민이 되는 바람직한 모습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 꾸었던 장대한 꿈이 모래성처럼 스러져가는 것을 느끼던 나이였기에 그 모습에 가슴 아련한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로샤인의 괴인들이 모두 마음속 깊이 따르는 뱀프 장군이 가지는 오오라도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이 말은 쉽지 않지만 녹록하지 않거든요. 왜냐면 실패는 아프거든요. 특히 거기에 들어간 노력이 많고,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패는 아픕니다. 뱀프는 실패에 아픔에 더해 선레드에게 직접 물리적인 아픔을 겪으면서도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주위 괴인들을 자상하게 격려하면서 다 같이 세계 정복을 이루자고 하는 뱀프 장군의 모습은 현실 앞에서 꿈이 조금씩 작아져 가는 것을 느끼던 저에게 눈부셨습니다.

 

 프로샤임 괴인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인 선레드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말씨와 행동거지가 불량하긴 해도 선레드는 자신이 하는 히어로 활동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옳은 일이라고 믿으면서 하는 이 활동에는 수입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두들겨 맞는 괴인들조차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월급이 나오는데 말이죠. 이렇게 미래가 없는 생활에 과거 선레드가 속한 전대인 웨더 스리의 동료들은 모두 히어로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때때로 다른 직업을 찾아보려고 하여도,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입이 없으니 연인인 카요코를 책임져 주기는커녕 오히려 보험외판원으로 고생하는 그녀에게 빌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가하냐는 물음에 과민반응하거나, 카요코 부모님을 대하길 껄끄러워하는 등 작중에서 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계속 표출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내성적이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레드의 성격이 문제를 키웁니다. 동네 반상회에서 반응을 보면 선레드는 이웃 주민들에게 오히려 백안시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옳다고 믿고 있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데, 주변에서 자신의 선의와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고, 그런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사랑하는 사람이 고생한다면 힘이 빠지죠. 제가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남들보다 몇 년이나 사회에 나가는 것이 늦었는데 그동안 이제는 좀 일을 줄이시고 쉬셔도 될 부모님께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하루빨리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해서 부모님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면 과연 박사 학위를 받고자 여기에 몰두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회의가 드는 날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선레드의 모습에서는 또 다른 비애를 느꼈습니다. 이런 것을 잊고자 선레드는 히어로 활동에서라도 보람을 느껴보려고 하지만, 슬프게도 선레드는 강해도 너무 강합니다. 모든 괴인이 펀치 한 방에 쓰러지니 단지 허무할 뿐입니다.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레드는 항상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事情らないが いのはじだね(사정을 모르겠지만 힘겨운 건 똑같구나)

わないで めあえるから(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위로가 되니까)

 

 천체전사 선레드 애니메이션의 두 번째 닫는 노래인 Forever’의 한 구절입니다. 삶은 빡빡하고, 세상은 때때로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나요. 우리 같은 소시민은 다시 한번 힘을 내고 현실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샤임 괴인들도, 선레드도, 이 작품을 보는 우리도 이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의 위안을 느낍니다. 힘들어 쉬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아서 '힘들지? 세상 참 먹고 살기 힘들다.'라며 웃으며 말을 거는 선배 같은 느낌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이 대단한 것은 이렇게 씁쓸하고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마지막에는 시청자를 웃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찰리 채플린은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은 반대입니다. 남이 보면 실패로 점철된 삶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웃을 수 있는 자그마한 행복을 찾아가는 게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의 여는 노래인 미즈노구치 태양족속 미즈노구치 태양족은 그 자체로도 신나게 따로 부를 수 있는 좋은 곡이지만 이 노래를 부른 Manzo의 경력을 보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철거 용역회사에 다니면서도 가수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무려 회사의 사가(社歌)로 일본 마이너 그랑프리에 우승해서 이렇게 프로로서 활동하고 있거든요. 현실의 벽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군상들을 그린 작품을 장식하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결국 꿈을 이룬 사람의 노래는 더욱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