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꾸러기 수비대(1995)

 저희 세대에게 십이간지,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를 어떻게 외웠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이 작품의 국내 방영 이름인 '꾸러기 수비대'가 나올 것입니다.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그 즈음해서 비슷한 소재를 사용한 아류작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왔죠. 그 중에서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되던 거꾸로 가는 동화’는 내용도 얼추 기억나네요. 그럴듯하게 전개되다가 갑자기 배틀물로 변하고, 그러더니 용두사미로 끝난 만화였죠. 보통 TV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은 같은 시간 대에 방영되는 경쟁작들이 많아서 처음부터 보기보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재미있다는 소문을 듣고 보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앞쪽의 몇 화는 보통 놓치게 되는데 이 작품은 4화인 토끼와 거북이’의 중간부터 봤으니 왜색 때문에 빠진 몇몇 화를 제외하면 그 시절에도 거의 다 봤었네요.

 

 작품의 내용은 동화의 내용을 비틀어서 동화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괴물들을 십이지 동물 친구들이 물리치며 이야기를 원래대로 돌리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는 이 괴물들을 보내는 적의 본거지까지 쳐들어가서 악의 근원을 물리치지요. 늑대를 두들겨 패는 무술가 빨간 두건이라든가, 고소공포증에 걸린 피터팬이라든가,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가벼운 분위기의 초중반과 달리 배신과 타락이 주가 되고 동료들조차 하나하나 죽어나가는 후반부의 진지하고 어두운 전개는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엄청 충격적이었습니다. 특히 보통 예외가 되는 비전투원 여성 캐릭터조차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상황에 저도 많이 놀랐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전원이 살아서 돌아오고 마라의 꾐에 넘어가 길을 잘못 든 쿠키를 포함해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깔끔한 결말을 낸 것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바로 전에 포스팅한 라무네 기사와도 각본가가 같고, 이 각본가가 유명한 작품에 많이 참여했었네요. 제작사 이름도 바케모노가타리 등으로 낯익은  샤프트이고요.

 

 이 작품을 다시 보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가정 형편 때문에 집이 없어져서 할아버지 댁에서 시내버스로 1시간씩 걸려서 등하교하던 시기였는데, 그래도 할아버지 댁 안방에서 그래도 꿋꿋하게 이 작품하고 독수리 5형제는 봤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과 같이 자기 띠를 응원하면서 봤죠. 부모님은 저희들을 보시고 집안 사정도 모르고 속 편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어려운 사정에도 안 비뚤어지고 순수하게 커준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이 시기에 봤던 TV 프로그램이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데 식구 넷이서 방 하나에서 살면서 애틀랜타 올림픽을 같이 봤고, 드라마 '목욕탕 집 남자들'과 '신고합니다'를 봤었죠.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그때 제일 좋아했던 건 닭인 '키키'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도 저렇게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좋아했던 것 같네요. 반대로 다른 글들에서도 많이 보이는 것처럼 그 당시 친구들하고 오로라 공주가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잘못한 거 아니냐는 떠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쿠키가 헤라로 타락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뭔가... 공무원의 비애가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직함이 공주지, 그냥 근무지 이탈도 못하고 권한은 거의 하나도 없이 상사 지시만 죽어라 따라야 하는 파견 공무원으로 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잘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규정 위반자의 개인 사정을 무시한 것 뿐인데 사실 공무원은 보통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게 보통이죠. 나중에는 과로로 쓰러진 건데 시청자들에게 중요할 때 도움이 안 된다고 욕먹은 거 보니 뭔가 가슴 아프더군요.

 

 그나저나 27화가 모비 딕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인데, 이 작품을 시청한 어린이 중에서 그 작품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제가 대학교 때, 영미 소설 수업을 수강하면서 읽었는데 기독교적 운명론적인 내용만 가득해서 페이지 엄청나게 안 넘어가는 작품이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양도 엄청 많고. 프랑켄슈타인도 이거 원작 소설은 얘들 읽기 부담되는 작품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