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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

 내년 2월까지 남은 휴가를 처리해야 해서 올겨울에 친구들과 스키 여행을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내일부터 23일인데 전날까지 회사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이틀 연속으로 스키를 타는 것은 몸이 못 배겨날 것 같아서 전날 하루 더 휴가를 썼습니다. 그렇게 지난달에 계획을 세웠는데 우연히도 이게 스파이더맨 개봉일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더라고요. 이 영화가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초 개봉이니 첫날 조조로 영화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극장에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예매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방이 어두컴컴하고 이불 속은 따뜻하여서 이렇게나 자기 좋은 날 굳이 영화를 보러 가야 하나 순간 망설여지더라고요. 나가면서 만약 영화가 재미없으면 굉장히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켓은 스마트폰으로 받아놓아서 추리닝 바지나 챙겨입고서 코 앞에 있는 상영관으로 바로 달려갔습니다. 백신이야 부스터샷까지 이미 맞았고요.

 

 초반 부분은 사실 좀 심드렁했습니다. 예고 편을 너무 많이 풀어서 영화를 미리 보고서 온 기분이었습니다. 첫날이라서 회사에서 자꾸 연락이 오기도 했고요. 사전준비로 바로 어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2편을 보았고, 거기서 문어 박사님과 스파이디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방을 보았기에 다리에서의 전투도 영 성에 차지 않더군요. 이러던 것이 반전된 것은 닥터 스트레인지와 스파이더맨의 전투부터였습니다. 전투 자체도 닥터 스트레인지 특유의 화려한 영상으로 눈을 사로잡았지만, 빌런들을 원래 운명대로 죽게 하자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의견을 거부하는 스파이더맨의 선의가 눈에 띄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 다음부터 흐르는 영화의 주제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세컨드 찬스, 두 번째 기회를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닌데, 한순간의 실수나 불운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영원히 결정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작품이지만 너와 나의 차이가 ‘One Bad Day’라고 부르짖은 조커의 말처럼 여기 악당들도 대부분 행운의 여신이 외면하지 않았다면 이런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범람하는 엄벌주의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에 진저리가 나던 참이라 정말 공감이 되더라고요. 피터는 이들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불행히도 피터의 계획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닥터 옥토퍼스를 선량한 오토 교수로 돌리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린 고블린의 충동질에 개개인의 탐욕과 처음 만나는 피터에 대한 불신이 섞이면서 피터의 선의는 메이 숙모의 사망까지 이어지는 대참사로 이어집니다. 피터도 이 사태를 일으킨 그린 고블린에게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고블린 글라이더로 쓰러진 그린 고블린을 죽이려다가 샘 레이미 스파이더맨에게 저지당하기까지 하죠. 그래도 언제든지 모두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서 스파이더맨과 싸우다 죽는 운명을 선사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영웅은 모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사람이다.' 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 세계에 들어온 다른 두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의 반지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네드의 도움으로 모든 빌런들을 치료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린 고블린의 폭탄에 의해서 마법은 본격적으로 폭주를 시작하고 닥터 스트레인지의 힘으로도 이를 막기 힘들어서 차원의 균열이 무너지려고 합니다. 피터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모두가 피터를 잊게 된다는 슬픈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잊힌 피터는 과거와 결별하며 혼자 서기를 선언합니다. 뉴욕의 단칸방에서 세 들어 살면서 수제 슈트를 입고 말이죠. 그와 동시에 영화는 기존 3부작과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아이언맨이란 거목의 그늘에서 보호받던 MCU의 스파이더맨은 이제 하나의 독립적인 영웅으로서의 한 발 내딛게 됩니다. 사소한 계기로 다시 MJ와 이어지는 로맨스도 기대했지만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네요. 자신 때문에 입은 MJ의 상처를 보고 한 발 물러서는 피터가 애틋하더라고요. 물론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시리즈가 길어지면 기존 팬들이 들어오기 힘들어질 수 있으니 설정을 리셋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요. 쿠키는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다음 작품의 스파이더맨의 앞을 가로막을 상대는 베놈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최근 다른 MCU 작품들을 보지 않았더니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전체적인 시리즈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