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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두치와 뿌꾸(1996) -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려 했지만

  올해도 돌아온 명절, 설날 특선으로는 이 작품을 골랐습니다. 한 열흘 정도 늦은 것은 오차 범위라고 치죠. ‘두치와 뿌꾸’,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96년도에 나온 만화영화였습니다. TV에서 국산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똑같은 작품만 반복해서 방영하는 것에 질려가던 상황이어서 새로운 작품이 방영된다는 사실에 당시 엄청나게 기뻐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새로운 애니메이션이 나올 필요가 있었는데 아기공룡 둘리가 나온 게 1987, ‘달려라 하니가 나온 게 1988년이니 슬슬 작품의 배경에 시청자가 공감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 나요.’라는 노래를 부르지만 저는 구공탄이라는 게 뭔지 본 적도 없고, 애당초 연탄도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까지만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세대입니다. 중동으로 돈 벌러 가는 사람들은 신문에서조차 본 기억이 없고요. 그래서 이 작품은 최소한 좀 더 제 어린 시절에 가까운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평가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가정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고, 작품 내에서 나온 대사처럼 쌀이 없어서 굶지는 않은 시대이기도 하죠. 반대로 요즘과는 달리 개들을 동네에 풀어놓고 키워서 골목길을 지나다 옆집 개와 마주치는 일이 흔한 시대기도 하고요.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때때로 나가서 한나절 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나중에 급우가 갈비집 앞에서 동네 개들 회합하는 자리에 있는 거 봤다고 하더군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마빈 박사에게 잡혀서 999년 동안 병 속에 갇혀있던 네 명의 괴물, 큐라, 리노, 미라, 몬스가 우연한 기회로 탈출하여 초등학생인 마두치 집에서 얹혀살면서 이들을 다시 잡아가려는 마빈 박사의 어깃장을 뚫고 선행을 통해서 인간이 되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으키는 문제 대부분이 선의를 가지고 행동은 하지만 마빈 박사가 꾸미는 음모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로 아기공룡 둘리를 연상시키는 구도입니다. 사실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저 넷이 두치네 집 가계에 끼친 피해를 더하면 절대로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어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적어도 옛 애니메이션 기준으로 끝까지 눌러앉아 길동이 아저씨의 등골을 빼먹는 녀석들과 달리 마지막에 독립하려는 모습은 대견하네요. 또한, 이 작품은 이들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비록 매끄럽지는 못하여도 이들의 선의를 인정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들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이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백안시한다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제 의식을 명쾌하고 세련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보면서 재미는 없었습니다. 보다 보면 지루해져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라도 돌리지 않으면 계속 보기 버겁더군요. 유치하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단점이 눈에 밟힙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밀도가 낮습니다. 이야기도 단조로운데 전개 속도도 별로 빠르지 않고, 그러면서도 25분 남짓 되는 방영 시간조차 채우기 힘들어서 절반 이상의 에피소드에서 이미 그려놓았던 이미지를 돌리면서 노래로 1, 2분을 땜질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기본적인 만듦새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만든 선배 중에서도 이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져보면 괴물 4인방 중에서 몬스를 제외한 세 명의 개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큐라, 리노, 미라의 대사나 행동을 바꾸어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던 큐라와 인간이었다가 괴물이 된 리노는 절대 같지 않을 텐데 둘의 차이점이 묘사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거기에 이들의 출신이 묘사되는 5화 전까지는 캐릭터에 감정이입도 안되어서 특히 3화까지는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음 세대의 둘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완성도가 그에 따라가지 못한 평작 정도가 이 작품에 대한 제 평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