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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독서

늑대와 향신료 10권, 12권

1.

하루에 4시간 이상 학부 시절 배운 과목들 복습하고 있고, 연말이라 사람 만날 일도 많습니다.

오늘만 해도 행정고시 합격해 5급 사무관을 단 후배들을 만나 신림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생각보다 읽는 속도가 안 나오고 있는 늑대와 향신료의 10권과 12권입니다.

11권,13권이 외전이라서 두 권씩 묶는다면 10,12권/11,13권으로 나누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2.

솔직히 10권은 좀 지루했습니다.

물론 이번 권의 내용은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파슬로 마을에서 시작한 여행이 레노스까지 북상한 후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아서 롬 강을 따라 내려가는 여행으로 바뀐 것처럼

눈 덮인 윈필 왕국의 수도원에서 여행은 두번째 전환점을 맞이하여 요이츠를 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다시금 북상하게 되니까요.

 

그렇긴 해도 이번 권에서 기대한 것은 '늑대의 뼈' 이야기의 화려한 대단원이었죠.

앞의 두 권이 마지막까지 찌릿찌릿한 긴장감이 도는 이야기였던만큼, 이번 권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걸 기대하고 책을 편 독자들에게 아마 이번 권은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늑대의 뼈'와 연관된 이야기가 마무리되긴 하지만 그것이 10권의 핵심도 아니고,

레노스부터 시작된 가슴뛰는 모험이 무색하게 결국 그 뼈는 가짜였다는 살짝 맥 빠지는 결말이기도 하고요.

특히 하스킨즈가 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이야기가 너무 싱거워서 자꾸 몇 페이지가 남았나 확인하게 되더군요.

 

대신 10권을 초반부터 이야기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습니다. 바로 '새로운 고향'입니다.

사정이 있어 고향을 등져야했던 자들이 새롭게 터전을 일구어 그들에 있어 고향과 다름없는 땅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죠.

호로가 자기 입으로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는 없는 발상이었고, 이는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스킨즈가 보여주었죠.

그리고 이것은 여행의 마무리를 걱정하는 로렌스와 호로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해줍니다.

돌아가봐야 아무도 없는 요이츠가 아닌 적당한 땅에 로렌스와 함께 정착하여 제 2의 요이츠라 여기면 살아가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이 가벼운 마음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합니다.

양치기가 되어서 양고기조차 먹으면서 살아가는 하스킨즈를 통해 이것이 얼마만큼의 각오가 필요한지 보여줍니다.

그래도 둘의 여행이 해피 엔드로 끝나길 바라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매력적인 선택지지요.

 

그 외에도 10권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여러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하스킨즈에게 어린 늑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호로라든가,

9권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상인으로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오른 로렌스라든가,

이런 걸 생각해보면 10권에 대한 불만은 단순히 급격히 템포를 내린 것에 대해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네요.

 

3.

12권은 북방 지도를 얻기 위해서 프람을 도와 천사의 전설을 조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요이츠를 구하기 위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지요.

 

지난 권에 이어서 새로운 정령인 유그가 등장합니다. 하스킨즈와 마찬가지로 양의 정령이지요.

이제까지 등장한 정령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현인 같은 면모를 보여준 것과 반대로 유그는 겁쟁이였습니다.

호로를 처음 봤을 때, 혹시나 하스킨즈를 해코지하고 자신도 잡아먹으러 온 것이 아닌지 벌벌 떠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양보다는 돼지를 닮았다고 묘사할 정도로 살찐 외모도 부정적인 선입견을 더하게 되지요.

 

하지만 첫 인상과 다르게 그 역시 양보할 수 없는 결의를 품고 있습니다.

고향을 잃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정령들에게 그들의 고향을 그림 속에나마 영원히 남기고,

이를 수행하는 프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큰 어르신인 하스킨즈와 척을 지는 것까지 각오하는 모습에서 누가 그를 비굴하다고 비난하겠습니까.

 

사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타우시그 마을의 영주도 그렇게까지 비난받아야하나 싶습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변하는 시류 속에서 정교도와 이교도 속에서 줄을 타면서 자신의 영지를 지켜온 것이니까요.

영지에서 싸움이 나면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게 누구일지 생각하면 기회주의적이라고 함부러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유그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유그처럼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면서도 현실을 지키고자 하는 자가 있는 반면, 스러질 줄 알면서도 떨쳐일어서는 자도 있으니까요.

자신들을 위해 마녀라는 오명도 기꺼이 뒤집어썼던 수도녀에 대한 죄책감에 불이 붙는 순간 일어날 일을 예상 못한 것이 그의 한계였죠.

 

4.

12권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늑대와 향신료가 어떠한 방식으로 맺음을 지을지에 대한 청사진이 제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령들이 활약하는 시기가 끝난 인간들의 시대에 남아있는 정령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에 녹아들었는지 보여주었고

호로가 어떤 성격인지, 여행에서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도 제시하였죠.

 

...가끔씩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독자의 예상을 깨는 것에만 촛점을 맞추는 작가도 있지만 그건 지금까지 읽어온 팬에 대한 우롱이죠.

다행히 이 작가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있을만큼 교양있는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