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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독서

늑대와 향신료 11,13권

1.

이야기가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면 불가피하게 스케일이 커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템포가 떨어지는 시점이 옵니다.

네, 딱 외전이 등장하기에 적절한 시점이지요. 11권, 13권은 모두 본편의 흐름과 떨어진 단편과 중편들의 모음집입니다.

 

두 권에서는 이제까지와 달리 호로와 로렌스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11권에서는 에이브가 주인공인 '검은 늑대의 요람'이, 13권에서는 노라가 주인공인 '양치기와 검은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각 권의 핵심이 되는 중편이면서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어 다 읽고 나면 11권은 에이브, 13권은 노라의 책이라는 인상입니다.

그나마 표지는 사수하였으니 호로도 체면치레는 한 것이 되려나요.

 

2.

이 두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콜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콜이 굳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냐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콜은 필요한 이유가 단편에 잘 나와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렌스가 남녀 관계에서 눈치도 없고, 요령도 없는건 익히 나와있지만 호로도 사실 둥글둥글한 성격이 아닙니다.

적당히 넘어갈만한 문제도 굳이 걸고 넘어져서 심술을 부리고 역정을 내는 경우가 있지요. 단편에서 지지리도 싸운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그래서 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부부싸움도 얘가 보는 앞에서는 자제하는 것처럼 완충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거든요.

콜이 없었다면 은근히 혹독한 호로의 태도에 로렌스가 못 버티거나 어딘가에서 무너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 입장에서도 3권 같은 이야기는 한 번이니 재미있지 반복되면 그다지 즐겁지 않을 것 같네요.

 

3.

11권의 첫 이야기는 사실 오랜만에 이유가 빤히 보이는 이야기였습니다.

눈치가 그다지 빠르지 않은 저도 말이 떨어진 순간 호로가 기분이 나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번째 이야기도 사실 좀 결말이 보이는 이야기였고, 세번째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볼란의 첫번째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더군요.

세 사람에게 전부 원망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인데 작중 누구도 그를 미워한다는 인상이 없어서요.

단순히 그런 사람조차 미워하지 않는, 또는 미워하지 못하는 당시의 볼란의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도와주고도 욕 먹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에 저런 일을 하면서도 미움을 사지 않는 것도 능력이죠.

 

13권을 요약하면 '다른 쪽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매 이야기마다 로렌스에게 식탐 늑대로 매도당하는 호로지만, 호로의 주장으로 식탐은 일종의 화풀이입니다.

호로가 원하는 것은 곁에 있으면서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인데 로렌스는 일을 할 때마다 호로를 혼자 두니까요.

로렌스는 2권에서 순진한 양치기를 속여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에네크의 말에 따르면 노라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게 고마워서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런게 1인칭 시점 소설의 묘미이죠.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시점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

덕분에 전체적으로 13권은 11권보다 재미있었습니다.

 

4.

단편이나 중편의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작가의 사상이나 취향이 좀더 명확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두 중편은 본편 이상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인물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지요.

 

'상처입고, 때로는 소중한 것을 남겨놓고 가야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

 

결국 아무리 글을 잘 쓰고, 소재가 좋고, 고증에 충실하더라도 이게 안 맞으면 소설은 못 읽습니다.

요즘 나오는 라이트노벨 중 몇몇은 완성도는 둘째치고 작가의 사상이 역겨워서 손을 못 대겠는 물건도 있거든요.

제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쿵저러쿵해도 작가가 그리는 인물상이 제 취향에 맞기 때문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