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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소녀종말여행(2017) - 받아들이기

 

1.

요즈음 애니메이션 포스팅이 끊긴 이유는 별거 아닙니다. 메텔과 함께 기차 여행을 하고 있는데 안드로메다가 정말 멀더군요.

그래서 잠시 일탈(?)을 해서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새해 들어서 실내에서 바이크를 돌리는 것으로 운동 방식을 바꾸었기에

컴퓨터의 모니터 각도와 스피커의 음량을 조절하면 매일매일 애니메이션 2편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1주일만에 이 작품을 전부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이 작품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치유물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장르를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이런 결합이 가능한 이유는 두 여주인공의 독특한 캐릭터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은 일단은 생존이 목적이긴 하지만 그 목적에 치열하게 매진하지는 않습니다.

죽는 것은 무섭고 싫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있지는 않습니다.

고아로 추측되는 둘을 키워주신 할아버지가 마을이 정체모를 군인들에게 점령당했을 때,

최상층으로 가라는 말과 함께 탈출시킨 것이 여행의 시작이었기에

영문도 모를 여행에 적극적인 목적 의식을 가지기 힘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이 작품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나오는 인간성의 마모가 드러나기보다는

인류 문명이 멸망한 잔해를 아직 채 철이 들지 못한 소녀 둘이서 나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자문자답하는 몽환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3.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위안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나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 말입니다.

이러한 여행의 목적은 사태의 해결이나 변화가 아닙니다.

여행을 마친다고 하여도 연인과 재결합하거나 시험에서 합격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저 당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둘의 여행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진하게 풍깁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에서 남아있는 식량과 연료를 긁어모아서 케텐프트라트에 싣고 다시 위로 올라가는 여행,

이 여행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도시에는 식량도 연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둘이 타고 다니는 차량도 언젠가는 망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 이시이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그 둘의 여행은 그 시점에서 끝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전에 식량을 생산하고 있는 사회에 합류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지만

새로운 층에 올라가도 사람이 없는 것에 그다지 실망하는 모습이 없는 것을 볼 때

이들도 인류는 이미 사실상 멸망했으며 자신들도 곧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적은 식량이나 연료로 버티기', '주위의 살아있는 사람들과 연락하기'를 고민하지 않고

'왜 전쟁을 할까', '신은 무엇일까', '생명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작품을 소녀 둘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작중에서 언급된 '절망과 친해지기' 지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종말이라면 적어도 웃으면서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4.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원작 만화로 뒷이야기도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마지막에 둘은 결국 최상층까지 올라가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그곳에도 아무것도 없는 새드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작품 속의 둘도, 작품을 읽는 저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큰 시험을 많이 치고 다녔는데

정말로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준비해서 시험장에 앉게 되면 이미 그 시점에서 목적을 달성한 기분이 듭니다.

결과가 좋고 나쁘고는 이미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매진하는 그 과정에서 충실감은 맛보았고

결과가 좋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고,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들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세계와 하나가 되는 듯한 일체감, 생명이라는 것은 끝이 있는 것이고 결국은 피할 수 없다는 깨닫음,

이 모든 것으로 가득 찬 여정이었기에 최상층에 오른 순간 이미 여행은 완성되었습니다.

 

단지, 긴 여행에 피곤했을 그 둘에게 잘 자라는 말을 해주고 싶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