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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The Big O(1기: 1999, 2기: 2003) - 걸작이 될 수도 있었던 작품

 The Big-O, 선라이즈가 1999년에 제작한 거대 로봇물입니다. 당시 선라이즈는 호평받는 메카물을 연이어 선보이면서 팬들을 즐겁게 해주던 시기였고, 이 작품도 그중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전통적인 일본식 그림체보다는 미국식에 가까운 화풍을 가지고 있으며 인물 구도도 배트맨과 유사한 면이 많아서 처음 볼 때 어린 시절 보았던 배트맨 TAS를 떠올렸습니다. (로저 스미스-브루스 웨인, 노먼 버그-알프레드, 댄 더스턴-고든을 대입하면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로저가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과 와이어 액션을 즐기는 것도 여기에 힘을 보태줍니다. 다만 상대가 범죄자뿐 아니라 도시를 지배하는 거대 권력이라는 점에서 차별점이 가집니다. 거기에 인간과 같은 감정은 가졌지만, 인간은 아니라는 점이 여러 차례 강조되는, 그리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성격이 까칠한 도로시라는 히로인과의 독특한 테이스트의 연애 이야기도 이야기의 진행에 양념을 더합니다. 다만 외부적인 상황에 발목을 잡혀서 더 좋은 작품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먼저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면 저는 이 작품을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로봇물의 추세는 마징가Z와 같은 초창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화적 상징성이 점점 퇴색되고 건담과 같이 로봇을 병기나 편리한 도구로 취급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로봇 자체보다는 그 로봇을 둘러싼 인간 드라마를 강조하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로봇물에서 로봇이 극의 중심에서 소외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로봇물은 거대 로봇의 매력으로 보는 것이다!!” 라고 외치는 이러한 복고적인 작품이 전 반갑습니다. 작중에서 거대 로봇들은 메가데우스라고 불리는데 이는 라틴어로 거대한 신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등장하는 것만으로 땅을 울리고, 걷는 것만으로도 무력한 인간들을 떨게 만들죠. 인간이 이룩하 문명의 상징인 도시는 이들의 싸움에 그저 성냥갑처럼 으스러져 갈 뿐입니다. 이 메가데우스들은 단순히 강할 뿐 아니라, 자격 없는 조종자를 거부하고 때로는 심판하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신과 같은 존재감으로 이들은 작품을 휘어잡고 이야기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로봇 액션에서도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화려한 기동을 바탕으로 한 우주전이나 공중전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쇳덩어리들의 인파이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피로하고 있습니다. 양팔의 가드를 올리며 돌진하거나, 모비딕 앵커를 사용하여 적을 끌어온 후에 서든 임팩트로 확실하게 적을 끝장내는 Big O의 싸움은 잔재주 없는 헤비급 복서의 싸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극의 진행에 있어서 거슬리는 단점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이 중 상당수는 작품을 둘러싼 외부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 꽤나 굴곡이 있는데 처음에는 26화로 계획된 작품이지만, 일본에서의 시청률 부진으로 13화로 일찍 종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국으로 수출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카툰 네트워크가 참여하여 14화부터 26화가 시즌 2로 다시 제작되어 방영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감독 등 제작진이 교체되었는데, 이는 시즌 2의 작품의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진 원인이 되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역시나 납득하기 힘든 작품의 마무리입니다. 이 엔딩은 작품 내에서 계속 강조된 복선을 회수한 마무리기는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이제까지 이야기하던 메시지를 전부 뒤엎어버린 마무리이기도 합니다. 최후에 밝혀진 진실은 패러다임 시티는 거대한 무대였고,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누군가가 주입한 기억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맡은 소임을 수행하게 된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대가 피날레를 맞이하면서 그 세계 자체가 지워져 가는 상황에서 로저는 엔젤과 협상하여 모두의 기억은 지워지지만 다시 한번 새로운 극이 시작되면서 작품은 종료됩니다.

 

 문제는 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이 자유와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비 오는 날 우산없이 춤추는 자가 있어도 괜찮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이 대사를 외치며 로저는 거대 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구조에 저항하고 작품 내내 알 수 없이 덮쳐오는 기억과 싸우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엔딩을 보고 나면 이 모든 노력은 헛수고입니다. 남이 심어준 기억을 바탕으로 사전에 계획된 행동을 하는데 어디서 자유와 정체성이 있습니까. 하다못해 최종전의 승패조차 사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암시가 싸움 도중에 흘러갑니다. 결국 로저는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인생을 영원히 반복하면서 이미 결정된 싸움을 반복할 것입니다. 이걸 납득해 줄 수 있는 시청자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Big 시리즈와의 싸움을 보면 시즌 1과 시즌 2의 차이가 확실히 보이는데 시즌 1에서 지상전 타입의 Big O는 공중전 타입의 Big Duo의 폭격에 고전을 하고 큰 피해를 입지만 한순간의 빈틈을 노려서 인파이팅으로 몰아간 후에 압도적인 화력과 내구력으로 상대를 끝장냅니다. 그런데 2기의 Big Duo는 드릴로 상대 조종석을 노리는 해괴한 전투 방식을 보여주죠. 공중전 타입이라는 개성을 전혀 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척 보는 순간 수중전 타입으로 보이던 Big Fau는 육상전에서 Big O를 모든 능력에서 압도합니다. 수중전은 작중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죠. 거대 로봇물에서 로봇이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 싸우는 것을 중시하는 저로서는 제작진의 능력 부족이라고밖에 얘기할 수가 없네요.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면 이 작품은 너무 기교를 많이 부렸다고 생각합니다. 복고풍인 작품이고 액션이 개성이 강하면서도 질이 좋기에 왕도적인 스토리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작진이 구상한 스토리도 독특하긴 하였지만 주어진 시간에 풀기에 좀 촉박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결과적으로 스토리도 난해해지고 로봇 액션의 비중도 줄면서 두 마리의 토끼를 전부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시즌 226화였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제작 조건을 생각하면 그저 한 팬의 바람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