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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카드캡터 사쿠라(1998) (1) - 멀고 먼 완주까지의 시간

 

초등학생 시절, 저녁까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모으는 마법이 있었습니다.

온종일 축구를 하다가도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TV 앞에 앉았죠.

'지구 특공대', '지구용사 썬가드', '전설의 용사 다간', '영광의 레이서', '슈퍼 그랑죠'

저녁 6시 반에 방영되던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당시 남자 아이들은 꿈을 키웠습니다.

 

여자 아이들에게도 이에 못지 않은 작품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웨딩 피치', '천사소녀 네티', '달의 요정 세일러문', '카드캡터 체리'

여자 아이들은 학교 쉬는 시간마다 이런 작품들로 이야기 꽃을 피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마다, 반마다 이런 여아용 작품에 대한 남자 아이들의 자세가 달랐는데

다같이 보면서 여자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도 하는 반이 있는 반면,

저희 반은 '저런 여자나 보는 작품을 보는건 남자답지 못해!' 라고 묘하게 허세 부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더구나 저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끝까지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친구들이 사실은 몰래몰래 다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작품들을 나도 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두번째로 이 작품을 접한 것은 KAIST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였습니다.

신입생들의 단골 질문 중에 하나가 '일본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 애니메이션을 추천해주세요.' 여서

아예 선배들이 반 공식적으로 정해놓은 대답이 있었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으면 애니메이션은 부적절하고, 차라리 일본 드라마를 봐라.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소년 만화는 거칠고 버릇없는 표현이 많으니

 적어도 주요 캐릭터들이 전부 바르고 고운 표준 일본어를 쓰는 카드캡터 사쿠라를 추천한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저걸로 공부하면 여자 초등학교 말버릇이 배어있는 일본어가 될 확률이 높죠.

저도 JLPT N1을 땄지만 일본어 공부는 제대로 책을 사서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Time 카드 봉인하기 전까지 두 번이나 보다가 잠들면서 당시에는 감상을 포기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특별한게 아니라, 정통파 마법소녀 작품은 저에게 수면제 수준이었습니다.

하다못해 나중에 나노하를 볼 때도 A's나 되서야 재미있었지 1기 13화 동안 3번이나 잠들었죠.

로봇물의 화끈한 액션을 좋아하던 저에게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요즘 들어 다시 이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매일 50분씩 방에서 싸이클을 돌리는데 땀이 떨어져서 책 읽으면서는 못 하겠더라고요.

덕분에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운동하게 되었는데

 

(1)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특별히 집중해서 볼 필요가 없는 작품

(2) 새로 산 컴퓨터로 수상한 사이트 들어가기 싫으니 쉽게 구해서 볼 수 있는 작품

(3) 예전에 보겠다고 마음만 먹어놓고 보지 않은 작품

 

를 만족하는 작품을 찾다보니 이 작품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운동하면서는 설마 잠들지 않겠지라는 마음가짐도 좀 있고요.

이렇게 대충 한 달 정도 걸려서 TVA 70화 + 극장판 2편을 끝까지 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