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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달려라 하니(1988)

 한국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인 달려라 하니입니다. 기억이 있던 시기부터 일요일 오후 1시에 TV를 틀면 반복해서 나오는 작품이라 단순히 오래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동생과 동갑인 작품이네요. 원래는 설날 특선으로 생각하다가, 그즈음 아파트 계약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 삼일절 기념으로 하려고 바꾸었는데 그마저도 날짜를 맞추지 못해서 애매한 시기에 포스팅하게 되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운동할 때나 집에서 식사할 때만 보는데 그 시기에 몸살기가 있어서 운동을 한 두 번 빼먹었거든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머니와 사별한 중학생 하니입니다. 어머니 사후 아버지는 국민 여배우인 유지애와 인연이 닿게 되고, 그 둘은 가까워집니다. 어머니를 아직 가슴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하니에게 유지애는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존재일 뿐이고, 그녀를 인정하지 못하며 삐뚤어져 갑니다. 하니가 그 응어리를 푸는 방법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달리는 것이었고, 새로 중학교에 부임한 체육 교사 홍두깨는 하니에게서 재능을 발견하고 육상 선수로 육성합니다. 홍두깨의 지도 아래서 하니는 정신적으로도 점점 안정적으로 되며, 단거리 부분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니는 유지애를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반발하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어서 단거리 선수로서의 선수 생명이 끊어지게 되고 해외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도 사고를 당해서 눈을 다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도 유지애는 하니 아버지의 뒷바라지와 하니의 재활을 지극정성으로 돕고, 그 모습에 하니도 마음을 열고 마음속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새어머니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하니는 장거리 선수로 전향해서 육상 선수를 계속하려고 하고, 그 첫걸음으로 국제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어린 몸이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응원해주는 모든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하니는 최하위로나마 완주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다시 볼수록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이게 88년도 작품인 것을 고려하면 당시 익숙한 전처의 딸을 괴롭히는 계모라는 익숙한 클리셰를 뒤집어서 친어머니를 잊지 못해서 자신을 아껴주는 계모에게 계속 상처를 주는 딸이라는 캐릭터도 혁신적이고 그런 딸이 친어머니를 떠나보내며 계모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발상도 대단합니다. 단순히 하니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안이한 전개가 아니라 그 후 닥친 좌절과 절망을 겪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던 호의를 다시 한번 깨닫고 내일을 향해 다시 한 걸음 내딛는 끝맺음이 훌륭하죠. 그 과정도 설득력이 있는 게 사실 하니와 유지애 사이는 결국 아버지가 없으면 붕 뜰 수밖에 없는 관계이지요. 그리고 하니 역시 유지애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에 저렇게 반항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유지애가 악역을 자처하자 하니가 당황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린 소녀 가슴에 맺힌 쉽게 풀 수 없는 응어리가 이를 사랑으로 받아주고 옆에서 지탱해 준 어른의 노력으로 풀리는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니가 유지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꽤 멘탈이 튼튼하다고 자부합니다. 겨울에 가스비 아끼려고 집에서 파카 입고, 온수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도 신경 써본 적이 없고, 과학고 시절에 동급생과 별로 관계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오기로 버텼거든요. 그런데 유일하게 제 멘탈을 완전히 박살 낸 것이 어머니 재혼 문제였습니다. 공부든 일이든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KAIST 석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시간을 낭비한 기간이었으니까요. 많은 사람에게 가족은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고 누군가를 그 가족으로 받아들이거나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난 있잖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로 시작하는 외우기 쉬운 가사와 좋은 멜로디로 저희 세대라면 모를 리 없는 노래입니다. 다만 오프닝 영상은 63빌딩이나 KBS 건물과 같은 건물이 주요 인물보다도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네요. 그리고 바람처럼엄마 품으로는 서로 바뀌는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덤으로 몇몇 장면은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는데, 예전에 신문 넣지 말라고 중앙일보와 몇 년을 드잡이질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애리가 신문 넣는다고 하니에게 뭐라고 하는 건 정말 공감 갑니다. 진짜 안 겪어보면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