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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독서

'마리아님이 보고계셔' 를 정리하며(1) - 8권까지의 이야기

 요즈음 결혼정보회사도 가입하고, 만남의 자리를 가질 때를 대비해서 나름 신경을 써서 가을옷 쇼핑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까지 이런 일상, 좋아하는 작품을 즐기고 그 감상평을 올리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괜히 뒤로 미루지 말고 좋아하는 작품부터 감상문을 쓰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 요즘 ‘마리아님이 보고계셔’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추억이 된 작품을 지금 다시 읽으려 하니 생각보다 큰 문제가 있더군요. 전 권을 소장하고 있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빠진 이를 채우려고 하는데, 이미 절판되어서 더는 판매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는 대형 서점은 이미 재고가 없고, 도서 전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쇼핑몰이나 중고 서점, 그리고 좀 오래된 동내 서점을 뒤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인데 벌써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거 같아서 안타깝네요. 그래도 3, 5, 6권은 구해서 오늘 포스팅하려는 8권까지는 전부 모았습니다. 언니의 언니인 장미들의 졸업까지의 이야기지요. 공식적인 구분은 없지만 제 머릿속에서 1부가 종료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 신데렐라가 성장하는 요람

 

 저에게 ‘마리아님이 보고계셔’가 어떤 작품인지를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신데렐라가 진정한 성의 안주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소녀의 성장기로 받아들였기에 KAIST 시절에는 동아리에서 이 작품을 저에게 소개해 준 친구와 이 작품의 장르가 어째서 백합이냐고 입씨름한 적도 있었지요. 생각해보면 의미가 없는 논쟁이었습니다. 작품은 받아들이는 독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광채를 띄기도 하니까요.

 

 후쿠자와 유미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처럼 신데렐라였습니다. 동경하는 산백합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히 장미관 회의실 밖에 서 있다가 동경하는 사치코 님과 추돌사고가 났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유미의 걱정과도 달리 몸을 날린 절벽 아래에는 천사님이 깃털이불을 펴고 있었고, 왕비님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못된 왕비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로사 기간테아, 엄격해 보여도 위기의 순간마다 히어로처럼 나타나는 로사 키넨시스, 유미가 신데렐라라면 이 둘은 성에 익숙하지 않은 며느리를 돌봐주는 왕과 왕비지요. 이들의 보살핌 속에 유미가 산백합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1부의 내용입니다. 신문부라는 평온을 어지럽히는 외부의 존재도 있고, 그 때문에 이런저런 소동을 겪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소동 속에서 다른 산백합회 멤버들이 눈부셔서 자신이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게는 약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동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지요.

 

2. 사치코의 우울

 

 이 작품은 대부분 후쿠자와 유미 시점에서 묘사됩니다. 유미는 사치코에게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고, 유미가 묘사하는 사치코는 아름답고 고고하고 자존심이 강한 완벽한 존재입니다. 작가도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하는지 사치코 시점에서 바라보는 페이지가 8권까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캐릭터 시점에서 묘사되는 단락이나,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둘 섞여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치코의 행동이나 대사를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유미의 선입견에 의한 왜곡이 상당히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장면에서 사치코는 대인 관계에서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걸 감추기 위해서 고압적인 태도로 허세를 부릴 뿐이지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카시와기에게 거부당한 경험 때문인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 겁을 내는 성격입니다. 유미는 사치코가 부족한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만, 사치코는 유미가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지 불안을 떨쳐내질 못합니다. 처음 읽을 때는 로사 기간테아를 질투한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그 문제였다면 좀 더 유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훨씬 건전한 인간관계를 형성했을 것 같네요. 설에도 냉큼 유미만 초대해서 둘이서 알콩달콩 잘 놀았을 것 같고요.

 

 물론 사치코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습니다. 둘의 자매 관계도 사치코가 몇 번이고 밀어붙이고 유미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맺어진 것이고, 볼 때마다 로사 기간테아에 안겨있는 유미가 자기를 볼 때마다 뻣뻣하게 얼어있으면 솔직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습니다. 거기에 유미도 뭔가 사건이 터지면 로사 기간테아나 레이부터 찾는 것을 보면 은근히 속으로는 사치코를 못 미더워하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허니문 기간에 황장미 자매의 전서구 노릇이나 하는 것을 보면 눈치도 없지요. 솔직히 사치코 성격에 자꾸 언니라고 안 부르고 사치코 님이라 부르는 것도 꽁했을걸요. 그래도 작중에서 여러 번 자매는 보통 언니가 주도권을 가진다고 강조하고 있고, 사치코는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관계를 돈독히 할 기회를 충분히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밸런타인데이에 데이트 한 번 하자고 고생을 할 필요 없이 주말에 같이 놀자고 부르기만 하면 유미는 황송해하며 달려왔을테지요. 새해를 맞이하여 집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자신이 말하면 거절할까 걱정이 되어 로사 기간테아를 통해서 권하는 것이나, 밸런타인데이 때 혼자서 참다가 폭발한 후에 혹시 유미가 로사리오를 돌려주면 어쩌나 겁을 내는 모습은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이 골치 아픈 성격은 로사 키넨시스가 학교를 떠나면서 유미에게 사치코를 부탁한 이유기도 하고 뒤에 크게 사건이 터지는 원인이 되지요.

 

3. 아름다운 이별과 세대교체

 

 소설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선대 장미님들은 졸업하였습니다. 졸업식을 배경으로 다룬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이 장미님들 졸업입니다. 날실과 씨실이 겹쳐지듯 서로의 개성으로 짜인 추억이라는 직물, 때로는 서로 손을 맞잡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기쁜 일, 슬픈 일,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사랑스러운 세월로 부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받은 학창 생활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번져가는 기분입니다. 한 조각 아쉬움이나 미련을 떨쳐버리고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별을 보여주었죠. 세 명의 장미님들의 개성과 그들의 우정을 보여주면서도 그것과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 진정성은 결코 모자라지 않은 봉오리들의 우정을 보여주어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는 것을 독자에게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