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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Infinity Saga

블랙 팬서(2018) - 익숙한 이야기와 이국적인 배경

1.

설 연휴 마지막 날에 후배와 함께 영화관에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개봉 첫 날에 갈 계획이었지만 부모님께 드리는 명절 선물을 싸들고 퇴근해서 영화관을 들리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

계획을 바꾸어서 연휴 마지막 날에 관람하였습니다.

 

2.

영화의 클리셰에 가까운 스토리라인을 보여줍니다.

이제까지 피해를 당한 가해자가 복수를 외치는 악역이 되고,

주인공은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복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과거 가해자들의 전철을 답습한다는 논리로 막아섭니다.

 

실제로 킬몽거는 와칸다를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지만

그 단어가 의미하는게 서구 제국주의의 정점에 선 국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아이러니가 없죠.

이건 정의 실현이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선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와칸다의 정책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기술과 자원의 독점을 통한 번영을 추구하면서 그 사상에 반기를 드는 자들을 철저히 숙청하였죠.

킬몽거의 아버지가 고통받는 동포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사상은 굳이 따지면 선의에 가까습니다.

거기에 킬몽거를 방치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와칸다를 물려받은 트찰라도 원죄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렇기에 트찰라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겠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동포들을 구하는 책임감 있는 국가가 되겠다고 하죠.

이로서 MCU 세계관에서 와칸다가 무대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3.

이 영화의 문제는 너무 진부하다는 것입니다. 저런 이야기는 다스 단위로 알고 있습니다.

음바쿠가 하품을 하면서 지루한 부분은 다 끝났냐고 하는게 제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로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의 눈을 스크린에 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리합니다. 자신들의 손에 든 것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죠.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와칸다라는 국가 그 자체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본 적 없는 아프리칸 문화와 고도로 발달한 미래 도시의 융합은 굉장히 신선하였습니다.

단순히 수도의 전경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기술력이 제공하는 방어력 덕분에 냉병기로 돌아가버린 아이러니나 코뿔소를 충격 무기로 쓰는 것도 새로웠습니다.

 

정치 체제는 전형적인 클랜 정치로 보입니다.

사실 자기 부족을 이끌고 독립하여도 풍요롭게 번영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저게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산업 혁명과 대량 생산 체제를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원과 기술의 독점으로 성립된 국가가 민주주의 정치를 채택하고 있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럽죠.

 

다만 정치 체제의 안정성을 지적하는 글은 좀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

슈리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부족들의 동의 하에 진행되는 전통 행사에 가깝고 실제로 결투로 왕이 바뀌는 일은 드문 것 같네요.

거기에 다른 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자의 도전은 거절해도 무방한 것 같고요. 왕이 위대한 전사여야 하니 체면은 좀 구길지도요.

그리고 보통 저런 정치 체제에서 왕은 진짜 조금 더 높은 부족 대표 정도라 왕권이 별로 강하지 않아요.

킬몽거가 힘을 받을 수 있던 것도 보더 부족의 지지와 이득 앞에 애매한 태도를 보인 다른 부족의 태도 덕일걸요.

 

3.

액션에 대한 악평이 많고,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단순히 연출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좋은 그림을 만들기 힘든 구조입니다.

 

블랙 팬서의 아이덴티티는 비브라늄 슈트입니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만들만큼도 구하기 힘든 희귀 금속으로 전신 슈트를 만드는 것은 와칸다의 왕만이 가능한 특권입니다. 

그렇기에 블랙 팬서는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적의 공격을 받으며 버티는 장면이 나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블랙 팬서는 이름처럼 고양이과 맹수와 같은 날렵한 액션을 보여주어야합니다.

여기에서부터 모순이 발생하는데 날렵하게 피한다면 슈트의 장점이 가려지고, 공격을 허용하면 날렵해야할 트찰라가 약해보입니다.

물론 최후의 결전을 지나치게 어두운 곳에서 펼치게 한 것은 변명할 여지없는 실책이었습니다.

굳이 어두운 곳이어야할 당위성도 없는데 슈트가 검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객이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오히려 조역들의 액션이 더 훌륭했습니다.

창과 쌍검과 같은 액션 영화에서 비주류 무기를 활용한 무기의 장점을 잘 살린 액션을 보여주었습니다.

 

4.

율리시스 클로는 상당히 유쾌하게 미쳤기에, 악당이지만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블랙 팬서의 적으로 어울리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서, 영화 중반에 킬몽거에게 살해당할 때 좀 놀랐습니다.

같이 간 후배도 좀 아쉽다고 하였는데, 앞으로 이어질 싸움의 규모를 생각하면 너무 급이 낮기도 하네요.

어찌보면 '블랙 팬서' 가 시리즈로 나올 영화는 아니라고 위에서 못을 박은 것 같기도 합니다.

 

윈터 솔저가 와칸다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킬몽거가 왕이 되면 곤란한 그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전투에 가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오지 않은건 좀 아쉽네요.

캡틴 아메리카는 좀 힘들지라도 윈터 솔저 정도면 아군으로 딱 적당한 수준이고 MCU와 연결 고리를 보여줄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5.

종합적인 평을 하자면 저는 뻔한 이야기를 독특한 소재로 살린 영리한 영화라는 생각이었고

후배는 단독작으로 보면 평작이지만 MCU의 큰 흐름에서는 꼭 필요한 영화였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