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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Infinity Saga

아이언맨(2008), 그리고 퍼스트 어벤져(2012)

 지금 우리가 1920년대를 재즈 에이지로 부르듯이, 먼 훗날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슈퍼 히어로의 시대로 부를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슈퍼 히어로 영화가 박스 오피스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제가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어린이, 혹은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의 전유물이었던 슈퍼 히어로라는 콘텐츠가 어느새 아이언맨 스마트폰 케이스나 블랙 팬서 티셔츠가 트렌디한 아이템이 될 정도로 대중에게 침투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MCU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오늘날 톨킨이 차지하는 위치를 100년 후의 케빈 파이기가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MCU를 떠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은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입니다. 어벤저스의 실질적, 공식적 리더이기도 한 둘은 여러 모로 상반되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나란히 나올 때 서로를 돋보이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특히 아이언맨은 자기 작품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피니티 사가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존재이죠.

 

 이 두 영화는 이들의 기원을 다루는 작품들입니다. '아이언맨'은 어떻게 억만장자 무기 상인이자 천재인 방탕아가, 슈트를 입고 정의를 지키는 영웅이 되는지를 그리고 있고, '퍼스트 어벤져'는 어떻게 브루클린의 약골이, 미국을 대표하는 전쟁 영웅이 되는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영화에서조차 히어로의 차이는 두드러집니다. 아이언맨은 갑주를 두른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평범한 인간인 토니 스타크일 뿐이죠. 그리고 그 토니 스타크는 잘 나가는 천재 기업가라는 가면 뒤에, 섬세하고 관점에 따라서는 연약한 정신을 감추고 있습니다. 안으로 갈수록 상처받기 쉬워지는 전형적인 외강내유 형입니다. 슈퍼 히어로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이죠. 캡틴 아메리카는 정반대입니다. 얄팍한 장식용 슈트 안에는 슈퍼 솔저 혈청으로 강해진 육체가 있고, 그 안에는 그 누구보다도 굳건한 정신이 버티고 있죠. 둘을 둘러싼 환경도 정반대입니다. 아이언맨은 슈퍼 히어로가 되기로 선택한 영웅입니다. 언제 어느 때고 그는 단순한 토니 스타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변에서 이를 종용하기도 하는데도 연약한 정신력으로도 스스로가 선택한 가시밭길을 걷는 것이 아이언맨의 정체성입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슈퍼 솔저 혈청을 맞는 순간부터 선택권이 박탈당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묘기 부리는 원숭이로 자조하면서도 미국 정부의 강요로 국채 모금을 다닐 수밖에 없었고,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과 혈청이 만들어낸 고귀한 정신은 그를 안팎에서 구속하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버키도 작전 중에 잃고, 마지막에는 70년 후에 깨어나면서 스티브 로저스로의 삶을 통째로 거세됩니다.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포기하고 주저앉거나, 타락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고귀한 선택을 보여주는 것이 캡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입니다.

 

 영화 외적으로도 두 작품은 묘한 대비를 느끼게 합니다. 아이언맨은 무거운 짐을 진 영화였습니다. 당시 아이언맨은 슈퍼맨이나 배트맨에 비해서 매우 떨어지는 인지도를 가진 작품이었고, 특수 능력이 없는 부자가 자금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영웅이 되었다고 하면 모두 배트맨을 떠올리던 시기였죠. 게다가 코믹스에서 '히어로 행세를 하는 빌런' 소리를 들을 만큼 사고를 치고 다녀서 인기도 하강세이던 시기였죠. 이러한 핸디캡을 딛고, '아이언맨'은 MCU 세계관의 주축돌을 굳건히 세웠습니다. 반대로 퍼스트 어벤저는 큰 제약을 가진 영화입니다.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뭉쳤을 때 서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두 영화는 선명하게 대비되어야 합니다. 토니가 난봉꾼이면, 스티브는 바른생활 사나이어야 하고, 토니가 유머러스한 성격이면, 스티브는 진중한 성격이어야 하고, 토니가 첨단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스티브는 맨몸에 의지해야 하고, 아이언맨이 현대적인 느낌을 강조하기에, 퍼스트 어벤저는 고색창연한 느낌을 강조하여야 하였습니다. '퍼스트 어벤져'는 단독 영화로서는 너무 심심하다는 평을 받는데 이건 매콤한 소재를 '아이언맨'이 가져간 결과라 생각합니다. 마치 스포츠에서 에이스와 블루워커를 보는 느낌입니다. MCU팀의 성공에는 두 작품 모두 크게 공헌했고요.

 

 재미있는 것은 많은 것이 대비되는 두 영화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영웅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아이언맨의 적인 오베디아 스탠은 토니와 같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강철 슈트를 입고 그 앞을 막아섭니다. 역시나 같은 슈퍼 솔저 혈청으로 힘을 얻은 레드 스컬은 나치의 일원으로 캡틴 아메리카를 적대합니다. 두 영웅 모두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진 빌런을 극복하는 것으로 영웅으로 자격을 증명합니다. '누구나 슈트를 입으면 아이언맨 아닌가?', '누구나 슈퍼 솔저 혈청을 얻으면 캡틴 아메리카 아닌가?'에 답이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헐크와 앤트맨도 같은 공통점을 가지는 것을 보면 MCU의 전통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토니의 성격은 정말로 멋지네요. 악인이 아니면서 이렇게 위태위태한 슈퍼 히어로는 처음 봅니다. 자신의 어깨에 얹힌 것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파장에 대한 최소한의 고찰조차 없습니다.

 

'내가 만드는 무기들이 악용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네, 이제 무기 안 만들어.'

 

이제까지 수많은 신무기를 개발하면서 악용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도 신기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면서 CEO로서 종업원과 투자자에게 미칠 영향을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기업인 자신이 무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 세계 평화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도 고민하지 않고요.

 

'내가 만든 무기의 해악을 책임지기 위해 아이언맨 슈트를 만들 거야.'

 

결국 무기를 막기 위해서 더 강하고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겠다는 결정입니다. 슈트가 사람을 날려버리고 탱크를 박살 내는 데도 이게 무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성격이 대답합니다. 특히 민간인 신분으로 국경을 넘어 분쟁지역에 개입하면서 정부나 각종 기관에 최소한의 양해조차 얻지 않았고요. '아이언맨'에서 토니가 한 행동을 정부 입장에서 보면 민간인이 독자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해서 시가지에서 시험 운행을 한 후에, 아무런 상의 없이 분쟁 지역에 무력 개입을 한 것입니다. 정부에서 기겁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목줄을 채우려고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정부와 군부에 대한 토니의 인맥과 영향력이면 이렇게까지 사태를 만들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여러 모로 경솔한 행동이었죠.인피니티 사가 내내 토니가 선의로 한 행동이 자꾸 문제를 만드는 이유가 정말로 명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