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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Infinity Saga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 - 훌륭한 틴에이지 드라마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 아니어서 블로그에 카테고리조차 만들지 않았었는데, 감상문을 쓰려니 어디에도 분류하기 애매하더군요. '영화를 본' 이야기라면 일상에 넣어야겠지만,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기에, 결국 애니메이션 카테고리를 확장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이 글은 'Infinity Saga' 카테고리로 옮겨집니다.)

 

 영화는 신촌 CGV에서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간 영화관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광고에 시작도 하기 전에 지루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오는 어벤저스 로고와 오프닝 음악이 졸린 정신을 확 깨우더군요. 그리고 이어지는 130분은 유쾌한 시간이 쉴 새 없이 이어졌습니다. 사 가지고 들어간 팝콘을 다 먹지 먹힐 정도로 말이죠. 영화 도중에 캐런이 '키스해' 라고 말한 부분에서 영화관 내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히어로 초년생이자 혈기만 왕성한 '소년',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

이미 인생의 쓴 맛을 보고 피터가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어른', 아이언맨

가족과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부하들을 위해서 빌런이 되어 버린 '가장', 벌처

 이 세 개의 톱니바퀴가 착착 맞물리면서 나오는 드라마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캐릭터들의 행동이 개연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쉽게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게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히어로 영화로서는 큰 단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네요. 히어로 무비에서 방점을 찍어주어야할 액션신이 상당히 부실해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스파이더맨의 능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점프가 높다', '맷집이 좋다.' 정도만 떠오릅니다. 특히 클라이막스인 제트기에서의 전투는 어두워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제작진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고, 홈커밍 데이 날 밤, 좋아하는 여자와 춤을 추는 것과 빌런을 막는 것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면서 소년을 졸업하고 한 사람의 영웅으로서 성장하는 상황이 이 영화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작품을 히어로물의 형식을 차용한 틴 에이지 드라마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매우 만족했지만, 정통 히어로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도 이해 갑니다. 히어로가 펼치는 멋진 액션과 미장센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기대 이하의 물건이니까요.

 

'슈트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면 더더욱 슈트를 가져서는 안 돼.'

 

이 말을 하는 게 아이언맨이라는 게 대단하고, 제작진이 얼마나 영리한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좋은 충고라고 느낄 수 있지만, 아이언맨을 다 본 사람이라면 저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대사를, 스파이더맨도 벌처도 아닌 아이언맨이 가져간 건 살짝 아쉽네요. 아이언맨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조역을 넘어 극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피터는 아이언맨을 동경하며 히어로를 꿈꾸며, 벌처는 토니의 안이한 일처리의 피해자입니다. 토니가 심어놓은 수많은 기능들을 발견하고 피터가 불만을 가지는 것이 극의 전환점이 되며, 피터가 벌인 사고의 뒤처리를 해준 것도 토니 고, 슈트를 회수하여 각성의 계기를 만든 것도 토니입니다. 마지막에 어벤저스의 가입을 권유하면서 피터의 성장을 인정하며 영화의 막을 내리는 것도 토니입니다. 아이언맨이 MCU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영향을 많이 끼치는 캐릭터이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한 경우는 없어서 좀 신기하네요. 자신의 사이드킥을 키우는 느낌입니다.

 

 벌처 사장님은 굉장히 공감이 가는 캐릭터입니다.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 가족이나 회사까지 다 팽개치는 것보다, 가족과 직원들을 위해서 위법조차 불사하는 캐릭터가 더 마음에 듭니다. 범죄나 폭력 그 자체에 취하지도 않고, 어벤저스에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는 한계도 항상 고려하면서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않으면서 오래오래 가정을 건사하고, 회사를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윙 슈트, 벌처가 나오는 장면마다 윙 슈트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양쪽에 터빈을 박아놓은 노골적인 디자인도 너무 마음에 들고, 그러면서 라인도 두근두근할 정도로 새끈 하게 뽑아놓았죠.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다루다가도, 어느 순간 장착 해제하는 활용도 너무너무 좋습니다.

 

리즈는 외모도 제 취향이 절대 아닌 데다가 어디에서 매력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고(사실 작품 내 위치도 캐릭터라기보다는 피터 파크의 일상을 상징하는 상징물에 가깝고), 머리 좋고 시니컬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피터에게 호감을 표시해주는 미셸이 기억에 남네요. 리즈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장났으니 아마 다음 작품에서 히로인으로 나올 것 같은데 상당히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