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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슈퍼 그랑죠(1989) - 한 세대를 대표한다

1.

전에 조석의 '마음의 소리' 를 평가하면서

한국 만화의 생산자 집단이 더 이상 화실을 통해 계승되지 않고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여러 작품에서 패러디하는 요소는 대부분 일본 작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드래곤 볼'이라든가, '슬램덩크', '그랑죠' 등이 많이 나오고 거기에 '천사소녀 네티', '세일러문', '카드캡터 사쿠라' 정도가 많이 쓰이죠.

 

그 중에서 '드래곤 볼', '슬램덩크' 는 가장 위대한 소년 만화, 가장 위대한 스포츠 만화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작품이지만

사실 그랑죠는 이런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러워할만한 작품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수십 년 후에 이 세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우리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하게 될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한 국가에 한 세대가 다비드의 별을 보고서 어떤 종교적 의미보다 하나의 로봇을 먼저 떠올리는건 생각보다 굉장한 일이죠.

이 작품 덕에 여성과 토끼를 조합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구리구리여서(...) 어렸을 때 이게 왜 야한 조합인 줄 몰랐습니다.

 

2.

이 포스팅의 제목을 정하는 것도 살짝 고민하였습니다.

원제는 '마동왕 그랑조트'로 쓰는 것이 맞지만 한국에서는 모두가 그랑죠로 알고 있는 작품이라 국내 방영 이름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국내에서 나왔을 때 그랑죠에 붙은 호칭은 무려 번개전사였는데

작중에서 대지와 화염의 힘을 사용하는 마동왕이지 번개 기술을 쓴 적이 없어 왜 저런 이름인지 어린 나이에도 궁금했던 기억이 있네요.

 

3.

이야기는 방학을 맞아 달로 여행을 오게 된 소년 다이치가 마동전사가 되어서

두 달 동안의 방학 기간 동안 사동족에 의해 고통받는 달 속의 신비한 세계 라비 루나를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네, 두 달이 맞습니다. 마지막 화 돌아가는 다이치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더군요.

여름방학 자유연구 주제로 로봇을 타고 세계를 구하는 학생이라는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이 작품이 총 41화이니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그랑죠에 타서 사투를 벌인 셈이 됩니다.

마동전사들은 보기보다 체력이 좋고 매일 로봇의 팔다리를 만들어내는 닥터 바이블도 본인 말대로 천재가 맞습니다.

 

각각의 에리어마다 에리어를 수호하는 존재가 있고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 전혀 다른 테마를 가지고 있는 다음 에리어로 진출가능한 구조가 게임을 떠오르게 합니다.

중간까지 진행한 후에 시작 시점으로 날려보낸 후에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구조도 모 게임을 연상하게 하고요.

 

4.

메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마동왕 셋은 상당히 미형입니다.

특히 슈퍼 그랑죠는 제가 이제까지 본 메카 중에서도 가장 예쁜 메카를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것 같습니다.

하얀색이 많아 밝아졌으면서도 원래 이미지 컬러인 붉은색을 유지하고 있는 색상 배합에

푸른색, 노란색이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져 있고 보고 있으면 어쩐지 보석을 연상하게 됩니다.

하나 정도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수집가 사이에서 얼마에 거래되는지 알고 나서 그럴 맘이 사라지더군요.

 

반대로 사동신들은 사납고 강인하고 기능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디자인이라서 둘이 대치하고 있으면 은근히 그림이 됩니다.

거기에 작중 닥터 바이블이 계속 개선하고 있다는 설정이어서 그런지

초반부 어정쩡하게 팔 다리만 붙어있던 사동신들이 뒤로 갈수록 점점 세련되게 뽑혀나오는게 꽤나 보는 맛이 있습니다.

다만 합체 사동신은 좀 아니었습니다. 저게 두 번만 나오고 안 나오는게 비주얼 문제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메카 전투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작품 내내 정정당당한 일 대 일 이라는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동원할 수 있는 메카는 전부 동원하는게 상식적이고 이게 비겁하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구도가 사동신 출현하면 다른 동료들이 그랑죠를 소환할 수 있도록 시선을 붙잡아두고,

그렇게 그랑죠와 사동신의 전투가 시작되면 추가로 윙자트나 아쿠아비트가 가세하는 방식입니다.

역으로 윙자트나 아쿠아비트를 먼저 소환하고 그랑죠가 가세하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다만 이것은 슈퍼 시리즈가 나오며서 바뀌게 되는데

우리의 슈퍼한 마동왕들이 적을 혼자서 이기지 못하면 곤란하니 여러 마동왕이 같이 싸우는 일이 사라지고

전투도 적의 공격을 받아낸 후에 바로 가이아 드래곤으로 끝장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주인공의 강함이 부각되어서 더 좋아했는데 지금 보니 투닥투닥하는 초반부가 좀더 재미있네요.

 

그랑죠 이야기 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셋의 비중 이야기인데

간단히 말해서 41화 중에 그랑죠가 못 나오는 화가 6화인데(3인 체제에서 출현율 85%)

둘이 사동족의 의식에 의해서 봉인당한 화이고 둘이 슈퍼 윙자트와 슈퍼 아쿠아비트의 탄생이니

사실상 나머지 둘에게 최소한의 지분만 주고 혼자 다 해먹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보통 비중 이야기 나오면 언급되는게 아쿠아비트인데 홀대받는 기체는 오히려 윙자트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아쿠아비트는 조금 더 적게 나와도 나오면 다른 두 마동왕에 비해서 우수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고

처음으로 혼자 나오는 25화 전투 장면이 신경 쓴 티가 팍팍 나기도 하였고요.

윙자트는 파일럿인 거스가 마동력 사용이 미숙하고 튼튼하게 장점이라 신나게 얻어터지는 장면이 많다는 인상입니다.

 

덤으로 저 표의 숫자 1은 다이치는 가는 곳마다 여자 친구를 만든다는 느낌이어서 한 번 세보려고 한 것인데

의외로 연애 감정이라고 표현할만한 곳은 5에리어 진입한 직후 라이무 정도 밖에 없어서 놀랐습니다.

라비는 가는 곳마다 작업을 하는 것에 비하면 영 성과가 없고 거스는 노인들과 얽히는게 보통인 슬픈 운명이라.

 

5.

그랑죠하면 빼놓은 수 없는 것이 음악입니다. 진짜 오프닝 곡과 엔딩 곡을 제외한 모든 곡이 명곡입니다.

일본판 오프닝 곡은 좀 별로여서 한국판 오프닝이 더 낫고 엔딩은 너무 안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여러 가지 음악이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역시 가이아 드래곤 소환시 나오는 음악입니다.

후반 기승전 가이아 드래곤 패턴은 좀 아쉽기도 하였지만 이 노래와 함께 나오는 필살기 연출은 최고였습니다.

대학시절에 한 동안 아침 기상 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6.

의외로 사동족 간부 셋이 쓰는 술법들이 근본이 있더군요.

샤먼은 대상의 신체 일부를 사용해서 대상을 재현하는 술법을,

나브는 진흙으로 인형을 만들어서 원하는 특징을 가지는 골렘을 만드는 술법을,

에느마는 마법약을 만들고 대상을 저주하거나 매혹하는 술법을 쓰는데 다들 근본있는 술법이지요.

 

그리고 라비 루나는 굳이 말하면 사동족들의 식민지이고

아그라만트를 호시탐탐 본국에 반란을 준비하는 총독이고

간부들을 뭔가 실적을 올려서 한직을 벗어나 출세를 꿈꾸는 장교라고 대입하면 은근히 말이 되는 장면이 많더군요.

어릴 적에는 악의 조직이라도 같은 편끼리 저렇게 견제하고 손발이 안 맞는게 말이 되나 생각했는데 크고 보니 현실이 더하더군요.

 

7.

당시에도 후반부에 전개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커서 찾아보니 조기 종영이었습니다.

아마도 라비가 슈퍼 아쿠아비트를 타고서 슈퍼 그랑죠와 격돌하는 장면이 삭제된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슈퍼 아쿠아비트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적안이 강조되고 손이 날카롭게 나오는 등 악역 기체의 특징이 강조되었고

기껏 마동전사를 세뇌시킨 후에 마동왕을 동원하지 않은 것도 자연스럽지는 않죠.

 

사실 조기 종영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다이치의 오르골이 만병통치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도 온갖 문제가 해결하는 아이템으로 쓰여서 나중에 이유라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맥거핀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다른 떡밥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라도 어찌어찌 다 회수를 했는데 저것만은 마지막까지 처리 못한게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