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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타카하시 루미코 극장(2003)

1.

KAIST 시절에 매주 돌아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동아리 내에서 상영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에서 여러 가지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타카하시 루미코 극장'은 란마, 이누야샤 등으로 유명한 타카하시 루미코 여사가 부정기적으로 모은 단편을 모은 작품입니다.

현재 시점으로 일본에서는 총 다섯 권이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타카하시 루미코 걸작선이란 이름으로 4권까지 정식으로 출판되어 있어서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P의 비극' 에 수록된 6편의 에피소드, '전무의 개' 에 수록되어 있는 6개의 에피소드, 그리고 '붉은 꽃다발'의 첫 에피소드,

이렇게 13개의 에피소드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 이 작품입니다.

저번에 사랑니 뽑은 자리가 1주일 내내 욱신욱신거려서 정신집중하는 활동하기가 쉽지 않다보니 금방 다 보게 되었네요.

 

2.

이 작품을 보면서 단편을 이 정도의 완성도로 낼 수 있어야 성공적인 장편을 쓸 수 있는건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화책으로는 30여 페이지, 애니메이션으로는 한 화 안에

캐릭터 소개부터 기승전결이 전부 들어있는데도 급하다거나 부실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군더더기 없이 풀어간다면 24분 안에 이만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하나 이 작품이 대단한 이유는 결코 달콤하지 않은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볍게는 고부 갈등, 애완동물 사육 문제부터 무겁게는 중년 부부의 불륜, 자살까지도 쌈싸름한 맛으로 녹여냅니다.

이런 자극적인 소재들을 쓰면서도 은은하고 싶은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이야기에서 현실감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 한 마디에 서운하고, 별 것도 아닌 것에 고집을 부리며, 때로는 사소한 일에 상상의 나래를 펴는

우리 주변에 하나 쯤은 있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보니 판타지 한 두 스푼으로는 현실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13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으라면 저는 '포이의 집'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이상한 수집품을 한가득 쌓아놓고 사는 남편이 답답해서 틈만 나면 버리려 들면서도 

정작 그 수집품을 반드시 찾겠다고 쓰레기장까지 가는 남편을 혼자 보내지 못하고 따라가는 부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엇갈림도 상당히 납득이 가는게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해 주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는거 쉽지 않아요.

더구나 이거 가지고 불이익을 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상사인데요.

 

엔딩곡인 '사요나라'입니다. 보통은 여는 노래가 작품을 대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닫는 노래가 더 기억에 남더군요.

곡의 내용은 점점 멀어져가는 연인이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이 무서워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후 후회하는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노래 자체도 좋고 거기에 담겨있는 자그마한 자존심보다 좀더 소중한 것이 있지 않냐고 말하는 듯한 가사,

그리고 등장 캐릭터들이 쉬고 있는 저 커다란 나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드는 영상 등이 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3.

각 권마다 6화가 실려있으니 5권이 나왔다면 2기를 위한 에피소드의 숫자는 모였긴 한데 솔직히 2기가 나온다면 많이 놀랄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작품이 요즘 아니, 애시당초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을 작품이냐고 하면 좀 애매한 작품인데

'이누야샤'의 실패(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실패라고 봅니다.) 이후 루미코 여사의 브랜드 파워도 좀 내려간 상태여서요.

현재 연재되고 있는 '경계의 린네'가 화제성 면에서 '이누야샤'에 비해서 얼마나 떨어지는지 보면 알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