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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2006)

1.

요즘 부활의 시동을 걸고 있는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첫번째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오랫동안 방치해놓은 후에 스토리를 정리하는 것도 아니라 단편집을 내놓는 것으로 부활이 될까 싶기는 하지만요.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그 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패권작이며, 교토 애니메이션이 이름을 떨친 첫걸음이기도 하지요.

거기에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이며 TV 애니메이션 작화 상향평준화의 시발점입니다.

무엇보다 나중에 '케이온'에게 바톤을 넘겨줄 때까지 일본 오타쿠 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군림하였죠.

엔딩에서 등장 인물들이 춤을 춘다던가, 작중에서 갑자기 밴드를 한다던가 다 이 작품을 묘사하는 수식어입니다.

작품 내용에 대한 호불호를 둘째 치더라도 향후 몇 년간 영향을 끼치며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2.

외전을 제외한 메인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쿈은 자기 뒷자리에 앉은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소녀와 얽히게 됩니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기행으로 유명한 그녀는 첫날 미래인, 우주인, 이세계인, 초능력자가 있으면 자신에게 오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요일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모든 클럽에 가입부해서 활약한 후에 전부 그만두어 버리는 등 특이한 행동을 반복합니다.

급기야 쿈과 몇몇 사람들을 모아서 SOS단이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을 결성하여 특이한 일을 물색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하루히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원치않게 말려들어 고생하는 쿈은 곧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SOS단의 나머지 멤버는 실제로 미래인, 우주인, 초능력자이고 하루히는 현실을 개변하는 신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히가 지금의 세계에 질려서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머지 멤버들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왜 이런 멤버들과 같이 SOS단에 가입된건지 탄식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나날이 이어지지만

결국 쿈이 자기 외의 다른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걸 본 하루히는 쿈을 제외한 세계를 부수고 다시 만들려고 결심합니다.

쿈은 그 창조의 순간 자신은 원래 세계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며 하루히에게 키스하고 둘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처음 볼 때도 느꼈지만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모든 갈등이 명확하게 해소된 깔끔한 작품입니다.

순서를 섞은 것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우울 1,2를 초반에 넣으면서 우울 5,6을 맨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한 선택이었죠.

그래도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을 1화로 넣은건 너무했습니다. 당시 1화를 반 정도 보고 이 정체불명의 작품을 포기했었거든요. 

지금 다시 보면서도 저 에피소드는 도저히 집중해서 볼 수가 없어서 적당히 틀어놓고 딴짓을 했습니다.

동아리 사람들이 꼭 보라고 나중에 추천해주지 않았다면 제가 이 작품을 보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3.

 

이 작품이 유행했을 때는 엔딩곡인 '하레하레 유카이' 도 대히트하였습니다. 하루히즘이라는 단어도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속한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 조를 짜서 그 춤을 연습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동아리에서 노래방을 가면 한 명은 노래를 하고 나머지는 안무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기억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걸 보면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참고로 저는 가장 좋아하는 곡은 삽입곡인 'God Knows'입니다. 노래방에 가면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4.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역시나 하루히의 행동 원리는 알기 쉽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고, 무언가를 같은 일에 몰두하고 싶으며, 좋아하는 사람의 멋진 모습을 보고 싶은겁니다.

평소 이미지와 달리 굉장히 소녀답죠. 본인은 감춘다고 하지만 하루히가 쿈을 좋아하는 것은 작중에서도 모두가 알 정도로 티가 납니다.

하루히가 화를 내고 폐쇄공간을 만드는 경우는 자기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처럼 보여도

사실은 쿈이 자신 외에 다른 여자, 특히 아사히나 선배를 더 신경쓰고 편들어준다는 것처럼 느낄 때입니다.

하루히가 유독 미쿠루에 대해서만 가학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연적에 대한 불만이 은연 중에 나오는게 아닐까 합니다.

 

그에 비해서 쿈은 도통 속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세계를 구하는 방식으로 하루히에게 키스를 하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봐서 하루히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쿈은 절대로 러브 코미디에 흔히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마음을 모르는 둔감한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런데 작품을 다시 한 번 보면서도 쿈이 과연 하루히를 연인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애매모호하네요.

어떨 때는 밖으로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아도 사실은 하루히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하루히의 호감은 알지만 친구 이상으로 가지 않도록 선을 긋고 본인은 다른 여자에게 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세 여성과 모두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선수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만만치 않네요, 쿈.

 

5.

이 작품은 아직까지 미완이고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요즘 작가가 다음 권을 내겠다고 선언했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이 작품에서 이미 하차했습니다. 이미 기다릴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새로 나오는 권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작가는 1권 이후 10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10권 동안 놀라울 정도로 스토리의 진전이 없어요. 경악에 들어서야 뭔가 시작하려고 하고 있죠.

그 전까지 작가는 나중에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파편들만 내놓았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소실이 이야기에 가까운데 이것도 전후 사정을 후속 스토리로 제대로 보충하지 않으면 꽤나 붕 뜹니다.

저는 작가가 과연 전체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글을 쓰고 있는지 자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작품을 하차한 중요한 이유는 한 5,6권 정도부터 작품을 읽는게 그다지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하루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게 그 즈음부터이거든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하루히가 원하는 것은 동료와 우정이고 그녀는 SOS단에 나름대로의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상 하루히의 폭주를 막는 SOS단의 진정한 활동에는 하루히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본인은 모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단원들도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지만 SOS단에서 그녀는 따돌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구도가 반복될 때마다 가엽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가 없게 되더군요.

 

그냥 이 작품은 1권으로 스토리가 군더더기 없이 완결됩니다.

여기에 자잘한 외전을 모은 2권을 추가한 후에 소실 정도만 더하면 깔끔하게 마무리되니 여기서 저는 만족하려고 합니다.

대책없는 작가의 방황에 더 이상 어울려 주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