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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신세기 사이버 포뮬러 SAGA(1996) + SIN(1998)

1.

11이 여러 모로 구멍이 뚫린 전작의 혜택을 받았다면 SAGA는 이미 완성된 작품인 ZERO의 후속작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시작했습니다.

레이스만으로는 결국 전작의 답습이 될 것을 우려한 제작진은

아예 TVA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인간과 기계의 융합과 공존이라는 테마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만 이미 여기서부터 저는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저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는 주제이고 이미 수많은 거장들의 손을 거친 주제입니다.

더욱이 단순히 애니메이션을 잘 만든다고 다룰 수 있는게 아니라 제작진의 내공이 중요해지는데 이걸 감당할만한 인선이 아니거든요.

솔직히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제작진 중에 스포츠에는 도핑 테스트라는게 있다는걸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게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거기에 나구모라는 악에 해당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는데

저는 슬램덩크 이후 스포츠물에서 반드시 쓰러뜨려야할 악을 등장시키는 시도를 촌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물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양팀 선수들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걸 슬램덩크가 증명해주었거든요.

 

2.

그래서 SAGA는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악조건 속에서 제작되었고 그 점을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 작품이 낙제점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딱 잘라 말하면 각본이 수준 이하입니다. 자극적이기만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먼저 이 작품이 누구의 이야기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야토의 이야기, 쿄코의 이야기, 아스카의 이야기, 필의 이야기 등이 정돈되지 않아서 복잡한 이야기도 아닌데 정신사나워요.

하야토의 멘탈을 억지로 망가뜨려서 갈등구조를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쿄코에게 좀더 포커스를 주는게 더 낫지 않았나 생각까지 듭니다.

전작에 비해서 새로운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는데 대부분이 도대체 왜 추가했는지 마지막까지도 궁금하더군요.

 

거기에 각본진이 하는 이야기가 별로 공감이 안 가요.

우선 하야토가 아스라다를 떠나 가랜드로 그랑프리에 도전하는게 어째서 나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대회를 목전에 두고도 아스라다가 완성되지 않은건 일차적으로 클레어 책임이고

머신이 완성되었다고 바로 타고 나가는게 아니라 세부조정도 필요하고 드라이버도 익숙해져야하는 상황에서 무리한 일정입니다.

이미 ZERO에서 아스라다는 하야토를 쫓아오기 힘든 모습도 보여주었고 제가 보기에는 배신이라고보다는 독립이거든요.

거기에 페이 건은 머신에 트러블이 생겼는데 치프가 공장에 전화하고 있는데 화 안 내면 부처님 가운테 토막입니다.

페이가 전작부터 시청자 입장에서 좀 짜증나는 면이 있었는데 치프가 된 다음에도 저런 반푼이 모습을 보여주면 치명타죠.

저 장면을 보니 열심히 단련시킨게 저 모양이냐고 미키까지 탓하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중간과정이 납득이 안가니 갑자기 멘탈이 흔들리는 하야토를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작품이 그냥 붕 떠버렸습니다.

 

거기에 쐐기를 박는게 캐릭터 디자인의 퇴화.

특히 아스카는 디자인도 전작에 비해서 나빠졌는데 작화도 망가질 때가 많아서 도무지 히로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남성 캐릭터들도 다들 머리카락만 길게 만들어서 오히려 몰개성해졌다는 인상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8화 밖에 안되는 작품인데 재미가 없어서 마지막은 쭉쭉 넘겨가면서 대충 볼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한 두 번 본 작품이 아니라 내용은 다 알고 있는데 이걸 집중에서 보기가 버겁더라고요.

진짜 건질 것은 오프닝 곡 밖에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리프팅 턴은 아무리 만화라지만 너무하다는 말이 나오더군요.

 

3.

SIN은 사이버 포뮬러에서 카가의 마지막 도전을 그린 작품입니다.

처음부터 카가를 멋지게 그려내기 위한 작품이었고 그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였습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을 잘 만든 팬픽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의 주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캐릭터가 나구모 쿄시로인데

SIN에서 결국 어떤 형태로든 나구모에게 승리를 안겨주었기에 시리즈의 주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엔딩이거든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시리즈에서 새로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시도는 다 괜찮은데

저 한 가지 때문에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이 작품을 최종 작품으로 생각하기 떨떠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