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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1994)

1.

사이버포뮬러 ZERO는 더블원으로부터 다음해와 다다음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 시즌 더블원을 달성한 카자미 하야토는 시즌 개막부터 4연승을 내달리며 독주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그랑프리에서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영역에 도달하게 되고 적응하지 못한 하야토는 란돌과 큰 사고를 내게 됩니다.

사고를 당해 생사를 넘나드는 자신을 보고 슬퍼하는 어머니와 아스카를 보고 하야토는 은퇴를 선언하게 되고

다시는 레이스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아스카와 약혼하게 되면 하야토와 란돌이 떠난 2018 레이스는 신죠가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나 한계 영역의 공포는 계속 하야토를 괴롭히고, 그 감각과 다시 한 번 싸우기 위해 하야토는 이듬해 레이스에 복귀합니다.

스고는 그를 위해 세컨드 팀을 준비하지만 1년 동안 개선이 없어 성능이 떨어지는 아스라다 더블원으로는 힘든 싸움이 이어지고

거기에 아직 그 끔찍한 사고의 기억이 남아있는 육체는 부스터 레버를 당기는 것을 거부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스카는 약속을 어기고 레이스에 복귀한 하야토에 분노하여 약혼을 파기하고 대화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야토가 한 사람의 레이서를 넘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2.

 

명작이란 어떤 작품을 칭하는걸까요?

예전에는 스토리 구조나 개연성을 따지고 무엇보다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담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 작품이 한 사람에게 10년, 20년이 지나도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을 남긴다면 그 작품이야말로 명작이 아닐가 싶습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ZERO는 손꼽힐만한 명작입니다. 

4화 '페가수스가 날아오를 때'에서 하야토와 아스카가 함께 부스터를 당기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육체와 정신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았지만 레이스를 잊을 수 없어서 서킷에 복귀한 카자미 하야토,

하지만 머신은 성능이 떨어지고 과거 사고의 원인이 되었던 부스터를 당기는 것을 육체가 거부하여 더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입니다.

아스카는 하야토를 걱정하는 마음과 자신이 아닌 레이스를 선택한 서운함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어느 것이 자신의 마음에 더 솔직한 선택인지 생각해보라는 클레어의 조언에 마음을 정하고 하야토의 힘이 되어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스카와 함께 하야토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뛰어넘어서 부스터를 당기게 되고 페가수스는 다시 날개를 펴게 됩니다.

이 때, ZERO의 오프닝 곡이 흐르게 되는데 이 부분의 가사가 '상처받고 부러진 날개, 지탱해주는 Tenderness'라서 절묘하지요.

 

3.

시리즈를 여기서 매조지하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두드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인 하야토를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어서 더이상 기술적 향상의 여지를 없앤 것도 그렇고

카가를 자신의 입을 통해서 슈마하, 란돌보다 강한 캐릭터로 못을 박은 후

이 두 캐릭터가 제로의 영역에서의 배틀을 벌이는 것으로 최종화 마무리를 지어서 팬들에게 더이상은 없다고 느끼게 하였죠.

 

하야토와 아스카가 한 사람으로의 인간으로서 성장함은 물론 둘이 함께 걸어가는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고

뭔가 한 걸음 모자란 느낌이 들던 신죠와 미키 커플도 미키가 아오이로 이적함으로서 드디어 골인이라는 느낌입니다.

여기에 란돌, 구데리안, 하이넬 같은 캐릭터에게도 적당한 엔딩을 주어서 마지막 화 엔딩에서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니 다음 작인 SAGA가 여러 모로 힘들었죠.

 

4.

이번 작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것은 미키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여성 캐릭터들의 미모가 상향된 ZERO에서 특히나 예뻐진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깔끔하게 정돈된 단발과 긴 다리가 강조되는 반바지 덕분에 전작에 비해 보이시한 매력이 넘쳐흐릅니다.

작중 스고의 원년 멤버이자 서브 히로인, 하야토의 이해자, 아스카의 친구, 신죠의 연인 등 각종 역할을 잘 수행하였습니다.

 

반대로 신죠는 참 못났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네요.

처음에는 하야토와 란돌이 없어서 의욕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적이 안 나오더니 하야토가 복귀하니 의식하느라 레이스가 엉망징창.

특히 레이스가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피트 크루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는 고질병도 여전하고요.

미키가 자기보다 하야토를 더 좋아한다는 망상에 시달려서 앙리에게 이용당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하였죠.

다른 레이서들이 반신반의하던 타이밍에 하야토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내던 신죠가 앞장서서 하야토를 비난하였죠.

사실 하야토는 TVA에서는 14세 나이에 그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계속 겪었다는 변호가 가능하고

ZERO에서 앙리 같은 경우에는 아동학대로 인해 성격이 뒤틀린 피해자에 가깝다는 인상인데 신죠는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예전에는 아무리 그래도 이사회가 너무한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는데 해고 언급이 나오는 10전 직후 포인트가 22점에 우승 0회.

성능 떨어지는 머신으로 중간 참가한 하야토가 그 타이밍에 2회 우승에 25점, 같은 머신의 세컨팀인 카가가 3회 우승에 55점.

2017년에도 하야토, 란돌 상대로 전패하고도 그 둘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어서 얻은 챔피언이라 저평가받을 수 밖에 없는데

다음해 성적이 저러면 왜 나도 챔피언인데 챔피언 대접 안 해주냐고 항변해도 공허할 뿐이죠.

 

사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신죠가 팀에 끼친 최대 피해는

11전 아시아 그랑프리에서 신죠 우승시켜기려다 카가가 리타이어해서 최종 포인트에서 앙리에게 밀려버렸다는 것이지요.

카가에게 받은 도움을 갚으려면 막말로 최종전에서 앙리를 들이박아서 리타이어 시키는 근성은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거기에 자기보다 빠른 레이서를 언급하면서 하야토와 구데리안을 언급하면서 구데리안보다도 아래라는 것을 스스로 인증한 것은 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란돌. 최소한의 분량으로 씬 스틸러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진짜 가장 진지한 순간에 진지해질수록 웃음이 나오는 캐릭터를 배치해서 분위기를 풀어주는게 너무 멋졌습니다.

 

5.

그러저나 이 작품에 나오는 '제로의 영역'이라는 말도 한 때는 꽤나 많이 쓰였던 말인데(마음에 소리 초반에도 나왔을 겁니다.)

이제는 이 말을 알면 30대가 넘은 오타쿠라는 것을 인증하는게 꽤나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