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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1991)

1.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여기서 신세기 GPX는 퓨처 그랑프리로 읽습니다.

전에 일본 기기가 들어있는 노래방에 갔을 때 작품 제목으로 검색이 안 되어서 고생한 적이 있죠.

저희 세대는 TV판은 KBS에서 '영광의 레이서'로 OVA는 SBS에서 '신세기 사이버포뮬러'로 본 나름 추억의 작품입니다.

다만 저는 95년도가 아니라 98년도 재방영할 시기에 보긴 하였지만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야기지요.

 

2.

TV판 내용은 바이크 레이서를 꿈꾸던 14세 소년 카자미 하야토가 우연히 아버지가 만든 아스라다에 타게 되어

그것으 계기로 아버지의 머신을 노리는 악당들의 마수를 피해서 사이버 포뮬러 세계 챔피언까지 오르는 내용을 그린 작품입니다.

 

...라고 요약하면 괜찮아 보이지만 전혀 조화롭지 않은 소재들이 섞여서 잡탕 느낌이 심하게 듭니다.

벽을 타고 달리며 바다도 달릴 수 있는 만능 자동차 아스라다와 그것을 노리는 악당 스미스와 앞잡이 부츠홀트 이야기와

스포츠 물에 가까운 사이버 포뮬러 레이싱 이야기는 상당히 궁합이 나쁘고 서로가 서로의 흐름을 끊어먹는다는 인상입니다.

세계대회 2회전인 페루 그랑프리처럼 두 이야기가 적절히 어우러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보통은 작품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냐에 따라 방향은 다르지만 팬들은 비슷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중반에 스미스를 퇴장시키고 레이싱 물로 방향을 트는 것으로 보였지만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중간에 파이어볼 레이싱이 나옵니다.

(그리고 란돌의 등장으로 기대감이 올라간 소년 팬들의 어마어마한 원망을 사게 됩니다.)

 

사실 저것을 제외하고도 한 화, 한 화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은데 전체적인 시리즈 구성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총 50화 예정이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로 13화를 채울 계획이었는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보통은 조기 종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못다한 이야기가 궁금한데 이건 조기종영이 살려주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3.

 

이 작품은 감독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후쿠다 감독은 아마도 2000년 대 초반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른 감독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건담 SEED의 애매한 완성도와 건담 SEED Destiny의 실패로 인해 각본가인 부인 분과 함께 한 때 건담 팬의 공공의 적이었죠.

실제로 이 작품에서도 SEED 시리즈에서 보여준 단점이 많이 나옵니다.

위에서도 말했던 일관성 없는 구성이라든가, 이야기와 캐릭터에 개연성을 부여하는데 실패하는 모습이라든가,

자신이 소재로 삼은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모습을 보면 SEED 시리즈 고질병과 판박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능한 감독이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은게 자신만의 장점은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일단 그림이 좋습니다. 단순히 작화가 좋은게 아니라 구도와 상황을 멋들어지게 그려내는 솜씨는 수준 급입니다.

그리고 음악, 그 SEED Destiny조차 음악은 좋았다는 말이 나오지요.

한 사람이 감독 생활 내내 음악이 좋았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운일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음악을 확실히 그려내서 그것을 음악 파트에 전달하고 그 결과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그림과 음악이 좋으니 장면 하나 하나가 가지는 폭발력이 어마어마합니다.

건담 시리즈 같이 진지한 작품이 아니라 좀더 가벼운 작품을 맡았으면 좀더 높은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아니, 애시당초 장점을 보면 감독이 아니라 연출가가 맞는 옷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래 연출가 출신이기도 하고요.

 

4.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이 의외로 여성 팬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남성 캐릭터들은 재능이 있고 꿈을 쫓는 순수한 존재지만 그만큼 상처받고 무너지기 쉬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남성 캐릭터들을 보듬어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탱해주는 것이 여성 캐릭터들이지요.

이런 구도는 사실 남성 팬들보다는 여성 팬들이 좋아하는 구도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영광의 레이서가 종영하고 나서 남자아이들끼리 최고의 레이서 이야기를 할 때

적어도 저희 학급에서는 가장 많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 나이트 슈마하였고, 그 다음이 란돌, 카가 순이었던 아마 그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름은 당시 방영 당시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일판으로 바꾸었습니다. 카가아 아마 번개였나 그랬었던거 같은데)

특히 신죠의 인기가 끔찍히도 낮았는데 흔히 남자아이들이 동경하는 멋있는 어른과 워낙 동떨어진 캐릭터였거든요.

 

거기에 하야토-아스카 커플은 하야토 입장에서 자기를 돌봐주던 2살 연상 소꿉친구 누나도 로망이지만

아스카 입장에서 자기가 돌봐주던 2살 연하 남동생이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도 만만치 않게 로망이니까요.

 

사실 완구 실적이 안 좋아서 TV판은 조기 종영했지만 OVA가 네 시리즈나 나온 시점에서 여성향이 강한 물건임을 짐작했어야했죠.

 

5.

이 작품의 하야토는 멘탈이 좋지 않은 걸로 유명한데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그냥 스고 팀 자체가 문제네요.

특히 가장 큰 문제가 오너 친구인 대머리 감독,

이 분이 메카닉하다 낙하산으로 내려와서 그런지 메카닉 팀의 멘탈은 잘 관리하는데 비해서 드라이버 멘탈 관리는 엉망입니다.

특히 드라이버가 14세라는 것을 생각하면 팀 적으로 가장 섬세하게 관리해야하는게 드라이버의 심리 상태인데

이걸 사실상 두 살 많은 소꿉친구가 전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팀이 아니지요. 하다못해 전담 닥터라도 두었어야죠.

사실 이 부분은 모터 스포츠, 더 나아가 프로 스포츠에 무지한 제작진의 책임이 크지만 그걸 시청자가 고려해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TV판에서 악역처럼 나오는게 아오이 쿄코이긴 한데 유리멘탈인 신죠를 관리해야하는걸 생각하면 오히려 납득가는 장면이 많네요.

에고가 강한 드라이버 상대로 평소에는 오냐오냐하면서 최대한 원하는 것을 들어주다가

정말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충격 요법을 사용하는게 그렇게 나쁜 방식만은 아니니까요.

 

사실 세계대회 1회전 미국에서도 나름 하야토의 심리도 이해가 가는데

슈퍼 라이센스 따는 과정에서 피트는 속도를 줄이고 안전하게 운전하라는 지시만을 내리고 손을 놓고 있었고

심지어 아스라다의 지시도 무시하고 드라이버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무리수와 도박수를 던져대면서 승리를 쟁취한게 하야토거든요.

사실 7등과 리타이어가 똑같이 노 포인트인 레이스에서 도박수를 던지는게 어찌보면 당연하니 피트에는 좀더 구체적인 지시가 나왔어야죠.

1등은 사실상 무리니 6등이라도 해서 포인트를 획득하는걸 우선시 한다던가, 후반에 가면 속도가 더 나오니 승부는 후반에 건다던가,

감독이나 피트에서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부분인데 이런걸 전부 드라이버가 짊어지고 있으니 당연히 레이싱에 기복이 생기죠.

거기에 언론에서 두들겨맞는 14세 소년을 보호할 생각도 안 하고 불을 지폈죠.

그나마 상식적으로 대응하는게 아스카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미 심각한 문제죠. 감독은 본인 멘탈이 나갔는지 아예 나오지도 않더군요.

 

6.

TVA는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평작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리즈는 OVA에서 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좀 많은 화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OVA를 위한 시행착오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