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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독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 제임스 놀스 저 / 비룡소

1.

제가 하고 있는 FGO를 포함하여 서브컬처 쪽에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고

'바위에 꽂힌 검을 통한 선별',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불륜' 등 여러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생각해보니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아예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구입하였습니다.

 

2.

다 읽고 나니 그리스인들이 굉장히 지적으로 보이더군요.

5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었는데 번뜩이는 지혜로 문제를 해결한 에피소드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서왕의 원탁에는 두뇌를 사용하면 죽는 전염병이라도 돌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 작품이 쓰여질 당시에 머리 회전이 뛰어난 기사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맹한 기사가 모범적인 기사였나 봅니다.

수많은 미사여구와 긍정적인 묘사가 있지만 다 읽고 난 제 머리 속에서 아서왕의 원탁은 야만인들의 집단으로 굳어졌습니다.

갑옷 입고 말 타고 가다가 똑같은 복장의 상대가 보이면 일단 싸우고 보는 자들을 달리 표현할 어휘를 찾을 수가 없네요.

 

3.

분명히 아서왕 전설인데 아서왕의 비중이 생각 이상으로 적네요.

너무 허황되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아서왕의 로마 정복기를 제외하면 국왕이 된 후에 완전히 존재감이 사라집니다.

다른 기사들의 이야기에 조연으로 나올 때조차 유능하고 현명한 모습보다는 무색무취하고 무기력한 이미지가 강합니다.

거기에 아내인 기네비어가 오로지 란슬롯만 바라보니 남자로서나 남편으로서 매력에 대해 의문점도 들고요.

마지막에 아서왕이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굳건히 중심을 잡아주었으면 원탁이 멸망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멀린도 아서왕처럼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서왕에게 있어 유비의 제갈량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약간 당황하였습니다.

성배 이야기도 그렇고 후반으로 갈수록 기독교적인 묘사가 강해지는데 악마 혼혈인 멀린이 활약하는 장면을 넣기 껄끄러워서일까요.

 

4.

기사들 이야기를 해보면 기네비어와 란슬롯는 이 책에서 묘사대로면 여지없이 유죄.

특히 기네비어는 남편 있는 여자가 자기 좋아하는 기사가 다른 여자와 어울린다고 길길이 날뛰는걸 보면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악역으로 묘사하려고 한 가웨인의 행동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억울하게 잃었으니까요.

제가 아서왕 전설에서 가장 마음에 든 기사가 가레스인 것도 한몫하는걸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가레스는 양식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전투바보 집단에서 몇 안되는 상식적인 행동이 가능한 기사라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다만 저는 흐름상 리오네스가 아닌 리넷과 이어지는게 자연스럽다고 느꼈는데 당시 감성은 지금과는 다른 것 같네요.

그나저나 케이 경은 분명 아서왕 등극 시점에서는 도량이 넓은 대인의 이미지였는데 왜 이리 소인배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가웨인의 취급은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입니다. 프로레슬링에서 쓰이는 자버라는 용어가 이 인물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시점에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대적자에 패배하여

'저 강력한 가웨인을 이기다니!' 혹은 '그 강력한 가웨인조차 패배시킨 누구를 이기다니!'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역할입니다.

 

5.

다 읽고 나니 아서왕 전설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구 신화만큼 메이저가 아닌지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각 이야기마다 캐릭터가 좀 달라지는 등 이야기의 짜임새도 좀 떨어지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감성이 좀 다르네요.

다른 기사도 문학은 안 읽어봤는데 이런 정서라면 좀 적응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