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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Infinity Saga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

1.

'시빌 워'를 보기 전에 관객들은 어떤 영화를 기대하였을까요.

둘로 갈라진 어벤져스, 아이언맨의 빔을 방패로 막아내며 돌진하는 캡틴에서 어떤 상상하고 극장을 찾았을까요. 

양보할 수 없는 정의를 걸고 처절하게 싸우는 어벤져스 멤버들과 두 정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기대하고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강렬한 액션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도 아니고, 관객들에게 사색을 요구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액션은 기본적으로 화가 난 친구를 뒤에서 붙잡거나 어깨를 잡고 주저앉히기입니다.

다들 힘도 좋고, 맷집도 좋으니 이 과정이 좀 화려하긴 하지만 양쪽 모두 이 정도는 괜찮다는 믿음 하에 때립니다.

관객들도 이를 알기에 공항에서의 전투는 재미는 있어도 불타오르는 무언가는 없습니다.

심지어 중상자가 발생한 순간 이 싸움은 바로 종료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관객들은 어느 쪽이 올바른지 바로 알게 됩니다.

소코비아 협정을 제시하는 인물이 과거 화려하게 사고를 친 전적이 있는 로스 장관이거든요.

그리고 나서 이 영화가 '어벤져스: 시빌 워' 가 아니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라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작품은 '큰 힘에는 그에 걸맞는 제약이 따라야 한다.'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를 논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답을 적어놓았거든요.

 

2.

이 영화가 좋지 않은 영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중국집에서 주문한 짜장면 대신 짬뽕이 나왔는데 다행히 그 짬뽕 맛이 절품인 케이스입니다. 

사실 영화는 상품이고 관객들이 소비자이므로 이런 상황은 살짝 불쾌하지만 그래도 영화는 잘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굉장히 서정적인 영화이고, 그 핵심은 '비애'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인물들의 비애가 얼기설기 얽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토니의 행동 원리는 스파이더맨의 입을 통해서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하지 않고, 그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

그러나 오히려 현실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나쁜 일을 막기 위해 뭔가를 하는 과정에서 원치 않은 일이 발생하지요.

외계인의 침공을 막기 위해 노력하다가 울트론을 만들었고, 소코비아 시민을 구하는 과정에서 주위는 쑥대밭이 되었죠.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듣는 상황에서 토니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협정에 서명하기로 결심합니다.

협정을 거부할 경우, 정부가 더욱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어벤져스를 옥죄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그이기에 무의식적으로 누구가 대신 책임을 져주길 바랬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일은 마음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그의 결정은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어벤져스는 둘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은 점차 사태를 점점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에 대한 분노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캡틴 아메리카가 버키를 감싸는 장면에서 폭발합니다.

"So was I"(나도 네 친구지). 이 짧은 대사 안에는 어마어마한 서운함과 분노가 묻어나옵니다.

 

캡틴 아메리카의 행동 원리 또한 명확합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지요.

그러나 그 정의를 초지일관 관철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벤져스 멤버들의 자유 의지를 앗아가는 소코비아 협정은 그에게 언어도단인 내용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정의를 믿고 따라와주는 친우들에게 찍히는 범죄자의 낙인은 그를 씁쓸하게 합니다.

 

그는 버키를 보호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 버키는 범죄자가 아니라 무고한 피해자입니다.

만약 버키가 체포되어 처벌을 받는 것은 캡틴 아메리카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불의입니다.

또한 그는 캡틴 아메리카와 스티브 로저스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페기의 장례식에서의 모습과 버키에서 자신의 과거를 묻는 장면에서의 미소는 그 뒤의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친구인 버키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상징인 방패를 버리고 떠나는 캡틴 아메리카와 남겨진 아이언맨, 둘 모두에게 진한 비애가 느겨집니다.

 

3.

헬무트 제모, 이번 작품의 빌런입니다.

 

영화 보기 전에 호평이 많아서 많이 기대했는데 첫 인상은 전형적인 내로남불 형 악당이었습니다.

본인 역시 소코비아 암살부대 출신이고, 당연히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거둔 적도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은 '직업'으로 생명을 거두고 다니면서 선의로 행동하는 과정에 일부를 말려들게 한 어벤져스에 저 정도 증오를 품는다?

솔직히 저는 눈쌀부터 찌푸려지더군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모가 계속 듣는 통화 내용 중에 '집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 이 부분이 핵심이 아닐까.

만약 내가 거기는 위험하니 최대한 멀리 피난하라고 말했다면,

아니, 통화 내용에서 말했듯이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집에 돌아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그 뒤의 슬픔과 죄책감이 그를 저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비애로 시작해, 비애로 얽혀, 비애로 끝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이번 작품에서 토니에게 슈퍼 히어로로서 성적을 매기면 100점 만점에 60점 정도입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더이상 아이언맨이 아닌,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소년으로 돌아갔습니다.

방패가 없더라도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만약 토니가 버키를 죽였다면 그곳에 남은 것은 슈트 입은 억만장자일 것입니다.

그의 분노는 공감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살인을 그는 영원히 영웅 아이언맨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로디가 추락한 상황에서 캡틴을 추격하기보다 구출을 우선시한 것이나 최후의 최후까지 캡틴은 죽이려 들지 않은 것에서

토니 스타크가 바탕이 선한 사람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영웅'으로의 한 발자국이 모자란 것이 계속 아쉽네요.

캡틴이 방패로 자신을 끝장낼 것이라고 생각해서 얼굴을 가린 장면은 그 미숙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그 직후, 캡틴의 서운함과 아이언맨의 자괴감은 아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5.

이번 작품에서 제일 납득하기 어려운 인물을 꼽으라면 '비전'인 것 같습니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뿐 아니라 공항에 모인 인물들은 스스로의 경험과 가치관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악의를 오랫동안 접하였고 거기서 반대의 결론은 내린 호크아이와 블랙 위도우,

캡틴과 함께 통제된 사회의 위험을 실감한 팔콘과 체제의 수호를 정의로 생각하는 워머신,

버키를 아버지의 원수로 여기며 복수심에 불타는 블랙 팬서와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고 싶은 버키,

스칼렛 위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힘을 쓰며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앤트맨에게 원래부터 법과 체제, 그리고 스타크와 별로 친하지 않은 인물이지요.

반대로 스파이더맨은 아이언맨의 열렬한 팬이며 그의 사상에 동조하고 있죠.

 

그에 비해 비전의 행동 원리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통제를 주장하는지, 어째서 통제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지 못합니다.

저는 로스 장관의 말에 우리가 아니었으면 더 큰 피해가 생겼을 것이라는 정론을 주장할만한 인물로 비전을 생각했습니다.

묠니르를 들어올릴만큼 선하고 순수하며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에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비전이라면요.

제가 느끼는 것은 스칼렛 위치에 대한 집착과 삐뚤어진 애정인데 이게 비전의 캐릭터와 어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6.

결국 어벤져스는 무너졌습니다.

마지막에 캡틴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지만 어벤져스의 절반은 수배자가 되어 쫓기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토니와 스티브의 마음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이 사건은 종료됩니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습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유망주를 수혈하는데 성공하였고, 블랙 팬서도 단순한 전사가 아닌 영웅으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타노스라는 시련을 앞두고 둘로 나뉘어진 그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