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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Infinity Saga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

1.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 멤버 중에서 가장 수수한 능력자입니다.

활을 쏠 때만큼은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는 호크아이보다도 더하죠.

남들보다 튼튼한 몸과 강한 힘을 가진 무술의 달인이라는 것인데, 이건 슈퍼 히어로의 기본 소양 같은 것이라서요.

 

그러나 감독은 첩보물의 형식을 취함으로서 이 단점을 가리는데 성공합니다.

단순히 힘이 센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이언맨이나 헐크, 토르를 찾을 수 밖에 없지만,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없고, 수많은 정의가 교차하는 복마전에서는 캡틴의 신중함, 사려깊음, 올곧은 의지가 두드러집니다.

 

또한, 이러한 수수함은 MCU 영화 중에서 가장 현실비판적인 이 영화의 색깔과 잘 어울립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강철 슈트의 남자나, 분노하면 녹색 괴물이 되는 남자를 보며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는 아무래도 좀 난이도가 있죠.

 

2.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퍼스트 어벤져'는 이 작품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는 것입니다.

'퍼스트 어벤져'에서 슈퍼 솔저 혈청을 맞아서 선성이 극대화된 스티브는 나치 독일에 맞서서 싸웁니다.

그러면 '선한' 캡틴 아메리카와 대비되는 '악한' 나치 독일은 왜 악한 것일까요?

'미국은 항상 선이니, 미국의 적인 나치 독일은 악하다.' 라는 관점이라면 '퍼스트 어벤져'는 단순한 국수주의 영화입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는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자유 의지의 소중함과, 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고결함을 강조합니다.

즉, 나치 독일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파시즘 제국이며, 자유 의지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USA PATRIOT ACT, 속칭 애국법을 입법하고,

공공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명분 아래 무차별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합니다.

입법 과정에서 미국 내 지식인 층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부시 대통령이 주도하여 이 법안은 통과합니다.

제가 2006년 UCLA에서 summer session 수업으로 로마사를 골랐었는데

당시 로마 제정 성립을 가르치던 중 교수님이 로마 시민들도 한 번 잃어버린 권리를 다시는 찾지 못 하였는데

백악관에 있는 머저리가 외부의 위협이 사라진다고 우리의 권리를 돌려줄 리 없다고 분노하셨었죠.

그리고 몇 년 전 스노든의 폭로로 이 법이 얼마나 남용되고 있는지 일각이 드러났죠.

게다가 '테러'와의 전쟁은 절대로 끝날 수 없기 때문에 이 명분을 절대로 없어질 수 없습니다. 개념을 어떻게 이기나요.

 

우리가 이렇게 안전을 위해서 자유를 하나하나 포기하기 시작한다면

100여 년 전 파시즘 국가에 맞서싸웠던 미국이 새로운 파시즘 제국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이 영화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캡틴이 선언한 것처럼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대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실드가 하이드라에 의해 점거되는 것에 저항한 인물들처럼, 우리도 파시즘 국가의 성립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3.

이 영화에서는 '캡틴 아메리카'의 고뇌 역시 드러납니다.

그가 살던 시대, 그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시간의 저편으로 스러져갔고,

잠에서 깨어난 이 시대에 영웅 '캡틴 아메리카'의 자리는 있지만, 인간 '스티브 로저스'의 자리는 없습니다.

 

아르님 졸라의 말처럼 시대에 뒤쳐진 자로서 포기하고 사라져갈 수도 있고,

반대로 파괴 행위를 일삼으며 그를 가로막는 버키를 끝장내는 것으로 인간성을 버리고 완벽한 영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하곤 싸우지 않아'라는 말을 통해서 자신은 캡틴 아메리카인 동시에 스티브 로저스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편한 길 대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옳은 길을 걷겠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순간이지요.

 

4.

MCU 세계에서도 이 영화는 큰 전환점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그 동안 히어로들과 정부 사이를 중재하는 실드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아이언맨'이나 '헐크' 등에서 나온 것처럼 정부는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무력을 가진 히어로들을 위험시하고 있고

히어로들은 이러한 정부의 태도를 고깝게 보고 있는 상황인데 둘 사이의 완충제가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그렇기에 닉 퓨리는 어떤 형태로도 실드를 남기고 싶어하였지만, 

캡틴의 말대로 실드는 원하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조직이 되었고 이런 조직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다만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최소한의 조직은 부활한 것 같네요.

 

5.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울트론을 만들겠다는 토니의 계획에 캡틴이 불같이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네요.

캡틴 아메리카의 눈에는 이 계획이 토니가 스스로 새로운 하이드라가 되겠다는 선언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다른 MCU 작품들과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신경을 쓴 장면이 여기저기에 눈에 띕니다. 

피아가 불분명한 실드 내부 암투라면,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이 개입하지 못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프로젝트 인사이트의 제거 목표에는 어벤져스 멤버들이 우선적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어벤져스가 수많은 개인 영화들을 하나로 묶었다면 이 영화는 이러한 묶음을 좀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