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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진지한 이야기

코로나19 사태에 대해서 끄적거리기

1.

사회생활 초년을 장식할 독특한 경험 정도로 예상한 코로나19 사태가 끝없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911테러, ISIS 봉기와 같은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911 테러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이 같지 않은 것처럼 이번 코로나 사태 이전과 이후는 다른 세상일 것입니다.

 

2.

우리나라가 외국에 비해서 방역에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잘 갖추어진 의료 체계에 더해서 공보의라는 정부가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의료인력의 존재,

그리고 신천지 사태가 터졌을 때 공보의 조기 소집과 이동으로 여유 의료자원을 대구에 모두 투입한 정부의 결단력.

전쟁으로 치면 적의 총공세에 예비대와 징집병을 총동원하여 대구/경북 전선을 붕괴하지 않고 버텨낸 셈입니다.

 

사실 지인들에게 듣고 있는 의료진과 공무원들의 근무 여건을 보면 직업 윤리로 인권 유린을 간신히 덮고 있는 수준이라서

서구 언론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이라는 말에 살짝 쓴 웃음을 짓게 합니다. 차라리 공화주의 승리라면 납득할 수 있네요.

권위주의 독재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민주주의 국가보다 효율적인 동원을 가능하게 합니다.

 

3.

저는 EU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기에,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EU는 그런 제 상상조차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문장 중의 하나가 "Friend in Need, Friend indeed."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상대가 힘들 때 내가 여력이 있다면 도와줘야 하는 존재하고, 반대 상황일 때 그렇게 기대하는 대상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때 EU는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인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남유럽 금융위기일 때 EU는 남유럽 국가에게 어마어마한 조건으로 마지못해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사태 때 EU는 국경을 폐쇄하고 각자도생을 선택하였습니다.

 

중국은 우한에, 우리나라는 대구 경북에 의료자원을 집중하고 사태가 진정세에 들어서자 대규모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왜냐면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우리 지방 의사들이 없어져서 불편하더라도 같은 나라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탈리아 북부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어나가더라도 우리나라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독일인, 프랑스인이 생각한다면 EU는 무가치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사실상 의미도 없는 입국 금지를 선언한 미국에 대해서 유럽 국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사태가 끝나면 드러나겠죠.

저는 저 조치가 이미 희미해져가고 있는 대서양 동맹의 숨통을 끊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4.

이번 사태에 대해서 가장 충격받은 것 중 하나가 미국의 대처입니다.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저렇게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미국이 과연 글로벌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일을 담당하는 부서들은 어느샌가 사라져있었고, 정책결정자들의 곁에 전문가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미국쪽 기사들을 좀 읽어보니 국내에 소개되는 것보다 상태가 심각하더군요.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할 연방정부가 손을 놓고 있으니 각 주 정부들이 각자도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이미 희생자를 줄이는 문제보다 경제적 타격을 줄이고 자신이 재선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5.

적어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입국 금지는 정서적으로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아무런 실효가 없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무증상자가 많은 코로나가 많은 사람이 눈치 챌만큼 12월 중순에 우한에 퍼져있었다면 이미 해를 넘긴 시점에서 늦었습니다.

실제 이탈리아에서 최초 발생이 10월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조사 결과도 있고요.

 

인터넷에서 입국 금지나 봉쇄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사람을 보면 힘이 빠집니다.

저는 중국을, 독재 정부를 혐오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고, 약자들을 희생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가장 중국을 비웃는 사람들이 가장 중국과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이더군요.

자유 민주주의가 이 둘을 포기한다면 권위주의 독재보다 나을게 없습니다.

차라리 이런 체제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한 시기에는 더 효율적이기라도 하고요.

하긴 유럽 지도자들이 자국민의 목숨보다 국가의 체면을 더 중요시하고,

미 대통령은 경제를 위해서 노인들의 목숨을 희생하지고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시대라면 이것도 하나의 시대정신인가요. 

 

6.

'인류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점점 회의감이 들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인류가 절멸당해야 패배가 아니라 막대한 인명 피해, 경제적 피해로 인류 문명이 쇠퇴한다면 그건 패배지요.

전문가들이 지금 사태가 종식되려면 빨라야 1년 반이 걸린다고 예상하고 있는데 과연 이 기간 동안 모두의 인내심이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가 끝나고 세계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로 덜 자유롭고, 덜 풍요로운 세상이 온다면 그것도 큰 후퇴가 될 것입니다.

그나마 전쟁 직후에 항상 베이비 붐이 온 것처럼 저출산 추세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희망은 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