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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영역/애니메이션-영화

드래곤볼 Z : 신들의 전쟁(2013) - 모두 나이를 먹는다. 오공만 빼고

 

 이 작품을 본 것은 제 스물여덟 번째 생일 파티가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전문연구요원으로 병역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수학과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공 서적들과 씨름하고 있는 저를 응원해주기 위해서 KAIST 애니메이션 동아리 후배들이 시간을 내주어서 대전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주었습니다. 그 후배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으로 화제가 흘러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드래곤 볼 새로운 극장판에 대한 화제가 나왔습니다. 이제까지의 극장판과 달리 원작자가 직접 참여한 후속작이라고 하더군요. 원작자가 참여하지 않은 세계관의 확장에 부정적인 편이어서 GT나 기존 극장판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십수 년 만에 부활한 원작자의 진짜 드래곤 볼에는 관심이 생겼고, 다음날 구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유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손오공은 쓰레기다.’라는 글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에서 보통 손오공은 강적과의 싸움을 즐기는 것만이 머리에 가득하고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묘사됩니다. 프리더를 유능한 상사로 묘사하는 것처럼 작성자도, 그 글을 읽고 웃는 사람도 진심으로 손오공이 쓰레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글이 유행했다는 것은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일정 이상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며 무엇이 예전과 오공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만들었는지 뼛속 깊이 느꼈습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만화 속 드래곤 볼 세계에서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만화책 1권에서 어린 소녀로 등장한 부르마는 어느덧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는 재벌이 되어있었습니다. 크리링은 18호와 결혼해서 딸을 가진 아버지가 되었고, 사이어인 편에서 꼬맹이로 처음 등장했던 오반조차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하다못해 베지터와 부르마의 아들인 트랭크스조차 슬슬 여자친구라는 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부르마가 나이를 물었을 때 마이가 마흔한 살이라고 한 것은 개그 장면인데도 시간의 흐름이 느껴져서 뭔가 철렁하더군요. 이러한 시간에 흐름 속에서, 많은 캐릭터가 처음 등장할 때와 달라졌습니다. 치사한 동기에서 오공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 크리링, 악당에서 든든한 조력자로 변한 피콜로와 천진반, 한때 최강의 인간에서 이제는 뒤로 물러나서 여생을 즐기는 무천도사까지 극의 흐름의 따라서 많은 변화를 겪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보여준 인물은 역시 베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베지터는 카카로트보다 강해지겠다는 목표, 강한 적과 싸우고 싶다는 욕망보다도 부르마와 트랭크스를 먼저 생각하는 어엿한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셀을 완전체로 만들어주던 그 시절 베지터가 더는 아니지요. 반면에 오공은 그대로였습니다. 홀로 그대로였습니다. 치치와 오반, 오천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계왕성에서 수련을 하며 자신의 강함을 추구하고 비루스의 이야기를 듣고도 위기감을 느끼기보다 한번 싸워보고 싶다는 투지를 불태웁니다. 초 사이어인 갓이 되어서도 지구를 지킬 수 있다는 기회를 얻은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스스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분해합니다. 몸은 커지고 나이를 먹었어도 처음 만날 때처럼 순수한 어린아이입니다.

 

 문제는 이걸 보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 변해버렸다는 점입니다. 소년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나이를 먹어 사회인이 되었고, 결혼하고 몇몇은 자녀를 두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소년으로 남아있는 오공에게는 거북함을, 같이 어른이 되어가는 베지터에게는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원작자 역시 어느 정도 인지를 한 것인지 손오공 = 이라는 당연한 드래곤 볼 공식을 벗어나서 피콜로가 오공은 순수할 뿐 정말로 선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슬쩍 돌려서 비판하는 장면도 있고 무엇보다 비루스에게 처음으로 유효타를 먹인 것은 순수한오공이 아닌 가장베지터였습니다.

 

 마지막 20대 생일을 보낸 다음 날 본 것이라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기분이 상당히 묘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을 넘어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게 그다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이 작품을 보면서 받았습니다. 덕분에 한동안 센치한 날을 보냈습니다.